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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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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 이정후가 2008년에서 2010년 사이에 제작한 일련의 사진작업 제목이다. 집 입구에 있는 ‘정원(garden)’과 함께 ‘멀리 있는 집’이라는 부제가 공통으로 등장한다. 이들 작업은 비슷비슷한 그러나 서로 다른, 각기 개성 있는 집 저마다의 표정을 담고 있다. 모두 이정후가 해외 체류 당시 만난 현지 삶의 표정이다.

당시 외롭고 낯선 이방인으로서 경험한 이런저런 먹먹함을 엿볼 수 있다. 이역만리에서 체험한 사회문화적 차이와 다름을 압축적으로 반영한 것 중 하나가 거주공간일 것이다. 여행을 하건, 일정 기간을 머무르건 간에 이방인에게 가장 신경 쓰이고 중요한 것은 아마도 먹고 자는 일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주생활 공간일 것이다. 낯설고 어색할 수 있는 서구의 주거문화는 작가 이정후에게 새로운 작업 모티프로 작용했다.

사진 속 집들은 대체로 생소하고 낯설다. 익숙한 풍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낯선 풍경도 아니다. 영화라든가 드라마에서 익히 보아왔던 풍경이다. 몇 개의 간단한 기하학적인 선들로 단순, 엄격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집의 모습은 일견 경직된 느낌을 주지만, 한편으론 친근하고 포근한 느낌도 준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카메라의 눈’으로만 포착했다기보다는 타향살이를 자처한 외로운 이방인 이정후의 ‘사람의 눈’으로도 들여다본 인간적 풍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로 저녁 무렵의 표정을 담은 사진들은 자연스레 가족들이 모여 있거나 각기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하지만 굳게 닫힌 문과 함께 어둑한 표정은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을 드러내기도 한다.

저마다 불은 밝히고 있지만,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서기에는 다소 부담이 될 정도로 엄격한 표정이기 때문이다. 뭔가 철저히 차단당하고 있다는 느낌도 엄습한다. 이국적인 표정과 함께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마저도 든다. 사진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정후는 현실적으로 느낀 것을 비현실적으로 풀어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는 흔히 길을 잃어버리거나 심리적으로 문화적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이정후는 자신의 지난 경험을 떠올렸다.
길을 잃고 헤매는 자신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도움을 주려고 하지도 않았던 답답한 상황, 불통의 감정을 반추했다. 유학생활을 했던 런던도 물론 포함되겠지만, 전시프로젝트 관련하여 방문했던 뉴욕과 시드니 등지에서의 전혀 생소한 경험도 이번 작업에 있어 주요 모티프로 작용했다. 주택가에서 흔히 만나는 영화세트장 같은 집들, 특히 야경을 눈으로, 드로잉으로, 카메라로 담기 시작했다.

도시건 주택가건 늦은 오후가 되면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는 희한한 풍경은 이방인을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다. 당최 누가 사는지 알 수 없는 풍경.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이 사는 형태가 보이는 비슷비슷하지만 다른 집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집의 구조나 정원의 형태들이라든가 꾸며 놓은 것들이 각각 달랐다. 공통점이 있다면 휴게, 거주의 공간으로 안정적인 유기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각각은 서로를 냉정하게 고립시키고 있어 보였다. 푸석푸석 건조한 사이를 무언가로 매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훗날 사진작업이 입체, 설치작업으로 작업이 이어지면서 공간을 매개하는 의자라든가 사다리 등이 등장하게 되는 구체적인 계기가 된 경험이었다.

이정후는 여행 당시 인상 깊었던 풍경들을 훗날 다시 방문해 찍기 시작했다. 작업을 위한 방문이었다. 뷰파인더를 피사체인 집으로부터 멀리 가져가 이런저런 집들의 표정을 멀리로부터 최대한 객관적으로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멀리 있는 집이라는 부제는 그만큼 작가가 심리적인 거리를 엄격

하게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진에는 구체적인 얘기들을 담을 수 없었다. 촬영을 하면서도 집을 바라보고 있는 작가 자신만이 존재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정후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각각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르게 세상을 살아갈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정후에게 있어 사진은 실제와 작업을 매개하는 것이다.

사진은 이들의 상관관계를 정확하게 설정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정후는 집의 정면을 주로 담았다. 이정후가 집을 특별하게 주목한 이유는 집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표정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각각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집들이 가지고 있는 가지각색의 표정으로부터 점차 전체 매스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전공이 조각이라서 일까. 평면으로부터 매스(mass)로 그의 관심은 옮겨 갔다. 점차 집으로부터 벗어나 그것을 '건물'로 보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모양이나 환원적 형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정후의 입체, 설치작업은 드로잉, 사진 등과 같은 평면작업으로부터 비롯했다. 이번 전시에서 이정후가 선보이는 사진들은 대부분 단일시점에서 담은 정직한 표정을 보인다.

반면 공간 작업은 그것을 다시점(多視點)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는 사람의 시선과 각도, 눈높이에 따라 다양한 표정과 그림자 그리고 메시지를 선사한다. 사진도 그러하지만 특히 입체, 설치 작업에서는 삼각형 등과 같은 예각 형태가 많이 등장한다. 중세 성당 건축의 첨탑을 보듯 뾰쪽뾰쪽한 모양이 많다. 곡선보다는 수평, 수직 등과 같은 기하학적인 선들이 많이 나타난다.

건물이라는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접근 방식과 산과 바다 등과 같은 자연으로부터 받은 영감과 경험을 추상적으로 풀어보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이들 모두는 누군가가 사용하는 공간으로서의 건물을 압축한 것이지만, 철저하게 출입이 차단당한 심리적인 불안이 군데군데 도사리고 있다. 최근 설치작업은 오르지도 내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둘이 간신히 서로를 지탱한 채 서 있는 의자들이 다수 등장한다.

기형적으로 특정 부분이 왜곡되거나 강조된 의자들은 역시 심리적인 불안함을 반영하고 있다. 자신이 경험했던 외롭거나 또한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절대적인 한계상황을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작가의 개인적 바람으로 보인다. 공감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상황을 최소 단위로 압축, 환원시킨 라인들과 여러 형태의 매스들이 등장하고 있다. 하나둘이 아닌 한계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피를 실어 나르는 혈류 동맥처럼 그것들을 이어주는, 즉 매개하는 것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사다리다.

이번 전시에는 대륙과 섬나라의 집과 건물들이 주요 모티프로 등장하여 이들이 적극적으로 섞이고 중첩되는 과정을 보인다. 이 과정 속에서 사다리는 공간의 분할과 연계를 도와주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빛과 그림자, 재료의 이질감, 이질적 공간과 공간사이의 소통, 통로의 역할을 수행하며 풀어낸다.

이정후는 평면(드로잉)과 평면(사진), 입체(집)와 입체(건물), 공간(사물)과 공간(주체)사이를 오가며 보이는 공간과 보이지 않는 공간, 가짜 그림자와 진짜 그림자에 대한 생각을 치밀하게 반영하고 있다. 낯선 느낌과 친숙함이 쉼 없이 교차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주목한 것은 낯선 공간속에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심리적인 반응이다. 이는 유학초기 집과 건물을 통해 경험한 낯선 문화적 체험과 그것이 작은 공간, 큰 공간으로 이어지면서 받은 감동과 심리적인 느낌의 차이를 작업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로 많이 머무르는 공간이 학교 작업실이기도 했지만, 당시 가장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 곳은 집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집이 가장 그립고 절실했기에 집을 통해서 당시의 낯선 외로움과 감정을 반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한 공간 자체를 어떻게 다시 심리적으로 분할하고 연계하고 매개할 것인가 하는 관심과 의문으로부터 이정후의 작업은 비롯되었다.




이정후는 '유연한 풍경'이라는 전시 타이틀처럼 풍경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집과 건물사이의 관계까지만 보여주는 풍경작업을 소개한다. 사진과 입체, 설치작업은 일견 잘 정돈된 느낌을 준다.

이는 아마도 전시공간의 특성상 설치작업을 제한적으로 적용, 소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정후의 이번 전시가 함축적으로 준비,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큼직한 매스와 의자들이 소개되고 사다리가 개입된다. 이들은 '어떤 풍경 1, 2, 3' 등으로 명명되었다.

거주와 이주, 정주를 암시하는 다양한 재료와 형태의 작은 매스들이 등장한다. 주재료는 아크릴과 시멘트와 나무 등이다. 실제 집을 지을 때 사용하는 재료들을 사용했다. 전체적으로 유연하지만, 인위적으로 조립된 풍경이다. 전시장을 통으로 사용했다.
이런저런 절제된 기억들이 바닥에 놓이거나 천정에 매달린 채 관객을 반긴다. 오브제를 더 사용하고 싶은 욕심을 억제한 디스플레이가 빛났다.



보기에 따라서는 심리적 고립무원의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사다리가 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는,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사다리다. 자유로이 다른 공간과 시간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수평적으로 이동할 수도 있는 그러한 수단과 매개로서 사다리가 채택, 적용되고 있는 자유공간이다.

사회, 문화적인 차이도 작용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작가는 특히 공간의 차이로부터 혼란과 갈등을 경험했다. 조각을 전공한 작가로서 가질 수 있는 감각적인 부분도 작용했다는 생각이다.

이번 전시에서 이정후가 보여주는 작업은 오랜 시간 가족과 떨어져 지냈던 당시 작가가 세상을 인지했던 방식이다. 작가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되고 경직된 경계를 넘어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꿈을 꾸고 환상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이정후가 선사하는 특유의 판타지는 공간과 공간, 시간과 시간을 아우르는 유연한 풍경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풍경들은 오랜 드로잉을 거쳐 물리적으로 구현되고 완성된다. 이정후는 이러한 풍경 속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살던 동네 풍경을 새롭게 반추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 꿈꾸던 침대나, 매일 지나다니던 공원을 자유로이 거닐기도 한다.

특정 상황이나 장소, 물체 등에서 느꼈던 순간의 감정들을 반추하고 개입시키고 응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정후의 풍경 속에 등장하는 오브제 모두는 공간과 공간, 시간과 시간, 사람과 사람을 매개하는 마인드 브릿지(mind bridge)로 작용한다.

이정후는 파편적이면서도 공감각적인 방식으로 매스들을 한껏 늘어놓은 다음, 공간에 들어선 관객들이 자신만의 독자적 방식으로 공간적 상상력을 발휘하길 바란다. 그것이 관객에게 또다른 낯선, 감각적 경험이 되길 이정후는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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