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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이미지를 추상적 요소의 풍경과 의미를 가지는 이미지로 나누어 본다면, 무릉도원의 모티브가 된 풍경과 현실의 의미를 내포하는 직립의 이미지, 직선적 요소가 화면 안에서 섞여있다. 이는 작가가 바라보는 현실의 모습(불편한 간극)이면서, 형상과 색이 만드는 불편한 조화는 현실과 이상의 불편한 조우 안에서 살고 있는 현대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희경의 풍경-현실과 이상의 간극, 또는 연옥 인간은 누구나 바람을 가지고 있다. 무엇인가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때로는 꿈, 때로는 희망, 때로는 욕망 등으로 불리는 그것은, 인간이 사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좌절이나 현실과의 불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온전한 삶을 져버리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전희경은 그러한 인간의 바람, 꿈, 혹은 가장 완전한 상태로서의 이상과, 실제로 처한 현실 사이의 간극을 주제로 작업한다. 그의 작업노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 그 관계라 함은 현실과 이상이라는 추상적 관계도 있지만.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 등 우리가 관계 맺는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며, 그 사이의 간극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 間, in between, 간극’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 현대사회의 삶에 커다란 존재로 자리 잡은 또 다른 무엇이다.…”
이렇게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과 이루고 도달하고 싶은 피안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자신과 타인, 나아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간의 현실적 관계와 이상적 관계의 간극에 이르기까지 ‘현실태’와 ‘이상태’ 사이의 관념적 공간으로서의 간극을 소재로 근자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그러한 관념적 공간을, 현실과 이상을 별개의 두 세계로 완전히 유리시키는 절연의 공간이 아닌, 그 양자가 있게 한 자기 자신이 매개가 되어 그들이 관계 맺는 공간으로 파악한다.
다채로운 색들이 눈길을 끄는 그의 화면에는 알듯 모를 듯한 여러 형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화려한 색채는 단청이나 불화, 혹은 민화의 그것을 연상하게 하며, 산이나 구름, 안개, 물, 바위, 그리고 이러저러한 자연물을 닮은 형상들과 그것들의 포치는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무릉도원을 화면 구성의 바탕으로 설정하고 있었기에 화면 전반에서 산수화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무릉도원이라면 이속(離俗)과 탈진(脫塵)의 이상향으로서 오랜 동안 화제(畵題)가 되어 왔었고, 그에 앞서 산수화라는 것이 노장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이념적, 심미적 공간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는 그림이라는 점에서,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주제로 하는 그의 이러한 차용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한데 그의 주제는 ‘별유천지비인간’이 아닌, 현실과의 간극이기에, 그의 그림에는 ‘인간’의 것이 함께 등장한다. 인간의 신체에서 비롯되어 유기물 덩어리나 내장처럼 보이도록 ‘진화’한 형상들은 육신을 가진 물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드러내며, 간간이 보이는 기하학적인 구조물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물질사회를 상징한다. 따라서 그가 재현하고 있는 공간은 현실과 희망 공존하는, 그 둘 사이의 중간지대인 것이다.
그곳은 결코 만족스러울 수도 없으며 그래서 결국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그렇다고 해서 외면하거나 도피할 수도 없는 차안이기도 하지만, 희망과 기대가 공존함으로써 절대적인 나락이라 단념해 버릴 수만도 없는, 그래서 피안의 빛이 드리우기도 한 곳이다. 욕망 덩어리로서의 육신과 물질의 화신으로서의 인공물이 존재하는 한편으로, 바위 사이 계곡에는 도화가 떠내려 올 듯한 물이 있고, 멀리 아스라이 안개에 싸인 산빛이
비치거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흰 구름을 인 원봉이 공존하는 사이사이에 육신의 욕망을 벗어던진 정갈한 인간의 이미지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가 이렇듯 현실과 이상 사이의 공간을 상정한 것은, 물론 그가 살아오면서 개인적으로 겪었을 현실과 바람 사이의 괴리, 이루어질 수 없음에 의한 좌절은 물론이고, 젊은이로서 목격해야만 했을 인간과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로부터 입은 상처와 각성이 있었음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짊어진 숙명이라는 사실에 대한 내면의 각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에게 비쳐진 삶이란, 긍정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못하며 게다가 부조리하기까지 한 현실에서 작디작은 한 가닥 희망을 품고 그것을 통해 피안을 보고 그것을 좆으며, 그 분투 속에서 희망을 소진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을 때, 또다시 진통제인 양 한 조각 던져진 희망을 잡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것이다. 하지만, 삶은 그러한 쳇바퀴를 포기해버릴 만큼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림으로써 그 운명을 넘어서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의 작업은 그가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눈, 즉 세계관과 인생관을 상징적으로 시각화한 도해와도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그러한 주제와 의식을 떼어 놓고 볼 때, 그의 작업은 한눈에도 매우 회화적이다. 밝고 다채로운 색채와 다양한 형태의 색면과 선에 의한 구성, 더불어 흘리고 바르고 겹치는 그리기의 맛이 함께한다. 그러한 까닭에 무거울 수밖에 없는 주제와 내용에도 불구하고 화면은 밝고 화사하다. 의도되지 않은 이러한 색채의 사용은, 물론 그의 기질에서 비롯한 것이겠지만, 그것이 세상이란 그저 암울하지만은 않아서 그래도 살만한 곳이라는 긍정적인 암시를 보이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그가 언제까지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작업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작업을 통해 발언하고 보는 이와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를, 자신의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사는 우리들 보편의 것으로 끌어 올리는 일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왔으며, 그러한 과정이 담긴 작업은 그것이 미술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절대조건임을 체득하는 시간이 되어 주었다. 그것은 그가 당시까지의 것들을 버리고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자 한적한 입주공간을 찾은 성과일 것이며, 또한 그간 작업의 주제인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에 놓인 번민을 ‘비웃듯’ 넘어서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보다 오롯이 화면과 마주하며, 그리기의 본질과 더욱 원색적으로 부딪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음을 뜻하게 될 것이다. ‘자신’과 ‘그리기’의 문제에 대한 분투의 한 끝에 와 있음인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간극이 만드는 풍경, 그 연옥은 다른 곳이 아닌 우리 내부에 있음을 그 분투를 통해 스스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구(스페이스씨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