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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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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전

  • 전시분류

    외국작가

  • 전시기간

    2012-06-21 ~ 2012-09-28

  • 참여작가

    펠릭스 곤잘레스

  • 전시 장소

    플라토

  • 유/무료

    유료

  • 문의처

    02-1577-7595

  • 홈페이지

    http://www.plateau.or.kr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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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 출신 이민자이자 성적 소수자였던 작가의 시계, 거울, 사탕, 전구 등 일상적이고 한시적인 재료로 ‘사랑’과 ‘죽음’이라는 사적인 삶과 사회, 정치적 비평을 병치시킨 설치, 퍼포먼스 44점




삼성미술관 플라토는 1980,90년대를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인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1957~1996)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Double(Felix Gonzalez-Torres, Double)』을 6월 21일부터 9월 28일까지 개최한다.


쿠바에서 태어나 1979년 뉴욕으로 이주, 사진을 전공한 곤잘레스-토레스 는 1988년 뉴욕에서 첫 개인전 개최 이후 AIDS 합병증으로 3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근 10년의 작품활동 기간 동안 소재나 형식 면에서 극도로 단출한 작품을 남겼다. 그럼에도 작가 사후 16년이 지난 지금까지 총 60회에 가까운 개인전과 700회가 넘는 그룹전을 개최하였고, 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대표, 2011년 그의 작품을 주제로 이스탄불 비엔날레가 개최되는 등 현대미술에 영감을 주는 신화적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는 보수파가 집권하던 1980~90년대 미국에서 쿠바 출신의 난민이자 유색인종, 동성애자, 에이즈환자로 사회적 소수자이면서도 변방의 이미지를 주장하는 대신 주류미술계의 시스템을 활용하여 그 허점을 내파하고 전복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확보했다. 그의 작업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시적인 은유와 정치적인 발언을 동일 선상에서 다루고 있다.



작가가 일생동안 작업했던 빌보드, 시계, 거울, 사탕, 전구, 퍼즐, 인쇄물 더미, 텍스트 등 일상적이고 한시적인 재료로 만든 작품들은 '사랑'과 '죽음'이라는 매우 사적인 삶과 사회, 정치적 비평을 병치시킨다. 동성(同性) 애인 로스 레이콕이 AIDS로 죽어가는 시간을 고통으로 감내해야 했고 그 자신 또한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작가는 흐르는 시간과 소진되는 재료로 죽음의 공포를 담으면서도 '영원히 다시 채워지는' 작품의 조건으로 재생과 영속을 기원했다. 또한 그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의 진정한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예술작품을 관람객이 변형, 소유하게 하는 등 혁명적인 대안을 제시하여 기존 공공미술가는 물론, 선배 개념미술가들과도 차별화되는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이번 전시의 주제인 'Double'은 작가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한 쌍의 오브제를 의미함과 동시에 완벽한 사랑과 사회적 터부(동성애), 작품의 감상과 훼손, 변형과 영속, 복제와 탄생 등 작품 안에 담고 있는 다양한 이중적 의미들을 상징한다. 그와 동시에 한 장의 증서로만 소유권이 증명될 뿐 ‘오리지널’ 원작이 존재하지 않으며 매번 새롭게 제작되고, 심지어 하나의 작품을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 장소에서 전시할 수 있는 곤잘레스 - 토레스의 작품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시아 미술관으로는 최초로 개최되는 이번 전시에는 뉴욕의 MoMA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미술관 및 개인 소장가 22개처에서 대여한 작가의 대표작 44점이 출품된다. 특히 플라토와 함께 리움, 삼성생명 서초타워, 서울 시내 여섯 곳에 설치된 외부 빌보드(옥외 광고판)를 전시장으로 활용하여 '반복'과 '복제'를 통해 '영속성'을 담보하려는 작가 작품의 특성을 반영하고자 하였다.


이번 전시는 오늘날까지도 현재진행형의 의미로서 공유되고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는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 세계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 기획 의도


이번 전시는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세계에 나타난 주체와 타자의 문제인식에 주목하고 그 관계를 ‘분신(Double)의 관계’로 파악하여 전시로서 실현하고자 한 시도의 결과물이다.


 1957년 쿠바에서 태어나 사회주의혁명으로 치닫는 쿠바에서 유년기를 보낸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는 1971년 수많은 쿠바 어린이들과 함께 스페인의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 후 푸에르토리코로 옮겨가 친척집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후 1979년에 뉴욕으로 이주했다. 사춘기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달았고 전 세계를 패닉상태로 몰아넣었던 AIDS의 재앙을 직접 목격했으며 사회적 편견 속에서 그 자신 또한 병마의 희생자로서 여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의 삶은, 그 자체가 주류 사회의 변방, 즉 ‘타자’였다고 할 수 있다.

프랫인스티튜트와 뉴욕대, 휘트니미술관 강좌에서 사진실기와 포스트모던 이론교육을 받았던 곤잘레스-토레스에게 타자에 대한 인식은 곧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생존의 조건을 확보하는 것과 같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교육을 받음으로써 “문화 속에서 자아가 형성 되고 언어가 덫을 만들며 권력이 행사되는 ‘지배 서사’에 빈틈이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그가 주체와 타자를 인식하고 그 관계를 설정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가 활발히 작업을 하던 1990년대는 문화정치학에서 다문화 담론이 활발히 논의되던 시기였고, 그 또한 주체와 차별화된 타자의 위치를 요구하는 대열에 앞장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체에 틈입하는 타자, 그래서 주체의 일부가 되어 궁극적으로 주체를 내파하는 타자의 위치를 선택함으로써, 영원히 타자로 남을 수 밖에 없는 다문화주의의 오류를 피했다. 대신 현실을 자신의 참호로 파악하고 그 안에 머물며 비판적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예술의 사례를 만들었다.


 Double의 사전적 의미는 쌍, 이중, 변주, 표리, 주름, 역주행, 함정, 반복, 분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는 마치 이 단어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 그의 작품 세계는 Double의 구현체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깊은 연관을 보인다. 시각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같은 물체를 쌍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둥근 벽시계, 거울, 커튼, 전구, 원환처럼 같은 재질, 같은 모양, 같은 오브제를 한 쌍으로 제시 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 또한 수 많은 스냅사진에서 침대 위 두 개의 베개나 쌍을 이룬 인형, 고양이, 새, 꽃, 과일, 의자처럼 커플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다룬다. 이들은 애틋한 사랑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으로 두 물체는 ‘완전한 연인들’이라 불릴 정도로 서로를 닮아 있다. 그런데 그 닮음 또는 동일성은 동성애적 욕망을 은밀히 시사하는 것으로서, 사랑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이라는 표면적인 미덕 이면에 사회의 금기에 대한 발언을 병치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작품의 이중적 의미 또는 작품에 함정을 배치하는 일은 그가 기존의 미술사를 차용할 때의 전략이기도 하다. 종이 더미나 바닥에 펼쳐진 사탕 작품은 그 형태가 미니멀 조각과 유사해서 관객들은 공인된 미술사의 형식에서 안전함을 느끼고 심지어 명상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을 가지고 작품을 대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 작품은 관객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되도록 방치된 것인데, 관객이 인쇄물을 가져감으로써 작품의 높이가 달라지거나, 사탕을 집어 감으로써 미니멀 조각의 하드에지적 특성이 무정형화되기 때문이다. 그가 미니멀리즘의 형식을 차용하는 것을 두고 ‘미학적 복장도착’이라 지적한 것이 흥미로운 논평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관객이 사탕을 먹는 것이 점잖은 미술관에서의 에로틱한 행위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에서 Double의 징후가 포착되는 것이 반드시 파괴와 전복의 의도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주체가 하나의 완전체가 아니라 이미 그 안에 분열, 즉 타자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당연한 일일 수 있는데, 이 Double의 진실을 통찰한 곤잘레스-토레스는 현실의 외피를 재현하기보다 실재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자 노력했다. 그의 모든 작품의 제목이 “무제”이고 경우에 따라 괄호에 넣어진 애매한 부제가 붙는 것은 이러한 통찰에 대한 미묘한 신호로 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모든 작품은 삶의 투영, 즉 사생활의 기록이었는데, 사랑, 그리움, 애도, 두려움, 죽음과 같은 존재의 문제가 작품의 주제가 되는 이유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무게 만큼으로 이루어진 사탕 무더기가 서서히 소진되는 과정은 죽음 앞에서 변모하는 육체를 은유하며, AIDS로 죽어가는 연인의 마지막 시간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고통의 나날을 고스란히 전달하여 보는 이를 숙연케 한다. 이때 병이 몸 안에 들어와 닫혀진 신체의 구조를 해체하는 과정은 주체와 타자의 상호작용으로 이해되며 더 나아가 작품에 관객이 개입하는 과정으로 대체된다.


그의 작업에서 소장자, 큐레이터, 관객은 작가의 분신으로서 작가를 대신 하는 지점에까지 근접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작가 자신의 일생을 적은 벽텍스트 작품 “무제”(1989)에서 그의 삶은 조각난 편린들로 기록되는데, 우리의 개별적인 기억들이 제각기 우선순위와 강도가 다른 것처럼 시간의 순서와는 무관하게 구성된 개인의 역사에 – 물론 여기서도 1986년의 연방 대법원판결, 1954년의 수소폭탄 실험, 1980년의 CNN 방송처럼,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공공의 역사가 뒤섞여 있다 - 타자가 개입할 여지까지 만들어 진다. 큐레이터 자신이 개인적으로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업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싶은 이 작품은 본인의 삶마저도 온전히 타인의 손에 내맡겨 주체-타자의 경계를 와해시키고 그 둘을 하나로 겹치게 만든 작업이라 할 수 있다. 1989년에 처음 제작하여 1996년 사망 전까지 본인이 모두 6개의 변형안을 만들었던 작가는 ‘변화만이 진정한 영속’이라 믿으며 본인의 사망 이후에도 전시하는 사람의 결정에 따라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초상’을 재구성하도록 했다. 이번 플라토 전시에서는 작가 생전의 마지막 변형안을 기반으로 다섯 개의 항목을 교체한 22번째 변형안이 전시된다.


Double의 개념을 전시로써 제안하고자 한 이번 시도는 동일한 작품을 플라토와 리움이라는 별개의 공간에 반복하거나 변형하여 설치함으로써 시각적 분신을 만드는 것이었다. “무제”(완전한 연인들)은 총 3개의 에디션이 모두 장소를 달리하여 반복 설치되고, 에메랄드와 은색, 투명의 구슬로 엮은 커튼 “무제”(시작)는 하나의 작품이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양상을 보여주며, “무제”(스톡홀름을 위하여)와 “무제”(북녘)은 쌍둥이처럼 닮은 두 존재가 다른 공간에 각기 나뉘어져 설치되는 현상을 보여 준다.


정신분석학에서 ‘Double(분신)’은 주체의 동일성이 외부에 체현된 것으로,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주체 자신보다 더 주체여서, 주체에게 ‘산산조각이 날 듯한 불안’을 안겨 주는 존재를 의미한다. “이 작품은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를 나의 두려움에서 시작됐고 그 두려움을 통제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나의 작품은 없어질 리가 없다.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파괴했었기 때문이다”라는 언급에서처럼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는 원본을 파괴함으로써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다.


사랑하는 연인과 친구들, 부모를 차례로 잃고 그 자신 또한 시한부의 삶을 살았던 그에게 죽음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연약하고 덧없는 삶은 언제 흩어질지도 모르는 것이었는데,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작품을 변형하고, 작품의 의미를 원하는 대로 재구성하며, 작품의 일부를 전시장 밖으로 가져가도록 허용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작품을 영원히 생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작품은 원본(주체)도 복제품(타자)도 아닌, 영원히 죽지 않는 분신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이다.


 아름다움과 애처로움, 행복감과 비극을 동시에 느끼게 하며 때로는 날카로운 비판으로, 때로는 달콤한 낭만으로 다가오는 그의 작품을 경험한 관객들은 앞으로 남은 여생 동안 때때로 그를 기억하게 될 지 모른다. 각자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잠자리에 들 때, 풍경을 바라볼 때, 조명등을 켜거나 시간을 확인할 때, 그리고 사탕을 먹을 때,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을 떠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Double은 우리의 삶에 고착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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