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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나우기획]장우진개인전"바람의 화(化)"

gallerynow


전 시 명: 장우진 개인전 [바람의 ]


■ 기    : 20120919()- 1002()


■ 오 픈 식: 2012 09 19() 오후 6


■ 관람시간: 10:00am-07:00pm


■ 장    : 갤러리 나우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2-13 3)


■ 문    : 02-725-2930 /gallery_now@hanmail.net/ www.gallery-now.com


 


[작가의 글]


 


바람의 화() - 체념과 희망의 경계


서울의 초등학교로 전학을 와서의 첫 쉬는 시간, 같은 반 아이가 다가와 가장 먼저 건넨 질문은 공부를 학급에서 몇 등 정도나 할 것 같은 가였다. 그 대답으로 인해 단번에 잘난척하는 전학생으로 찍히고 다시 이사를 하기까지의 1, 서울에의 적응은 정말로 불가능하게 느껴졌었다. 그 사이의 시간은 단지 저 첫 대면의 순간만을 뇌리에 남긴 채 증발이라도 한 듯 기억에서 지워져 있다. 추억이 없는 시기에 대한 기억은 쉬이 사라져, 마치 삶의 일부를 잃어버린 느낌을 주곤 한다.


전학생을 새 친구가 아닌 경쟁상대로 인식하던 초등학생의 존재는 그만큼 아이들이 공부에의 스트레스에 과하게 노출되어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 집 사이를 떠돌며 유년기를 도둑맞는 사이, 어른들 또한 쉴 틈 없이 일을 하며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일이라 자기 최면을 건다. 이러한 배경에는 아마도 그처럼 살아가는 것이 최선인 것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현실이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사실 개인이 각기 자신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특히 역경을 극복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 성취를 이루는 개인의 모습에는 영웅적인 감동이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영웅들을 숭상하며 누구나 승리와 성공을 꿈꾸고 희망한다. 그러나 승리에의 동경은 많은 경우 자신들의 꿈에 다다르지 못한 패배감을 함께 안고 간다. 실패가 수치로 받아들여지는 속에서의 사람들은 사회, 경제적 지위의 획득을 위해, 그리고 획득한 지위의 상실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 친다.


그런데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 경제적 지위의 향상은 많은 경우 타인이나 다른 집단을 희생시켜 이루어진다. 때문에 현대 사회에 만연한 개인들의 성공에의 예찬은 다른 한편으론 불평등의 찬미이기도 하다. 모두가 같은 것을 향해 손을 뻗을 때의 사회는 개인에게 그 어떤 거친 자연보다 더 억압적이고 폭력적이 될 수 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정진은 너무나도 쉽게 삶을 고달프게 만드는 경쟁으로 화해버리곤 한다.


[바람의 ] 전시는 개인들의 꿈과 욕구가 가지는 이러한 양면성을 시각화함으로써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의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는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하는 시도를 담고 있다.


작품 속에서, 오르고 뛰고 추락하고, 매달리거나 서로를 밀어내고, 때론 끌어주거나 잡아주기도 하는 작은 인간상들은 각 유형별로 각기 다른 존재 상태를 상징한다. 작고 나약한 풀 한 조각이나 한 방울 물에 다름없는 형상들은 한데 모여 서로가 서로를 기어오르고 앞으로 나아가며 큰 덩어리를 이룬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과 파도는 곧 이들 형상들이 존재해 나가는 지형이 된다. 이러한 지형은 대공황과 금융위기 주식 그래프의 인용이라던가, 고전 이미지의 차용 등으로 얻어지기도 하고 형상들을 쌓으면서 우연히 생성되기도 한다. 어느 경우이던지, 이 지형들은 개체들의 내적 본질이 일정 법칙에 따라 형상화된 확장된 표현형(extended phenotype)에 해당한다.


여기서의 아이러니는 이처럼 수많은 개체들로 이루어진 이미지 속에선 결국 각각 개체가 지니는 비중이나 영향력은 한없이 작아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인간 형상은 전체의 소용돌이를 구성하는 입자일 뿐만 아니라 이를 무력하게 관조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이기도 하다. 나의 작업을 설명하는데 있어 열쇠가 되는 단어로 Sublime을 꼽는 이유이다.


미학에 있어 우리말로 숭고로 번역되는 Sublime의 개념은 원래 불가항력의 힘을 지닌 거대 자연에의 경외심과 두려움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뿌리로 한다. 하지만 산업화의 물결과 함께 도시가 성장을 하면서는 도시와 대중이 Sublime 미학의 또 다른 축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대두된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계급 대중의 존재는 지배층과 자본가 계층에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을 마주하는듯한 막연한 불안함과 경외심, Sublime의 감정을 느끼게 했다.


이처럼 산업화에 이은 현대사회로의 이행은 결국 숭고미의 중심을 ‘아름답지만 두려운 대자연‘으로부터, 가늠할 수 없이 비대해진 사회와 그 안의 인간들에게로 이동시켰다. 자연의 대부분이 관상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사이 인간이 만들어낸 시스템은 자연의 대체물로서 삶의 전반을 지배한다.


개인들의 욕망, , 바램들은 한데 뭉쳐지면서 하나의 흐름으로 표출되고, 이렇게 형성된 흐름은 보다 많은 욕망들과 공명하며 증폭되면서 그 내제된 형태를 드러내고 구체화된다. 마치 바람이 산을 깎고 파도를 일으키듯, 인간의 바람은 갖은 풍파와 격동을 일어내며 사회를 빚어낸다. 우리 사회의 모습이 다름 아닌 사람들의 바람의 화현(化現)인 이유이다.


이렇게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흘러가는 사회이지만, 그 거대함 속에서 개인으로서의 인간 존재는 한없이 불안하고 무기력하다. 공산주의의 태동과 파시즘의 대두, 세계대전과 이어진 냉전시대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듯, 그리고 전 세계로 번진 작금의 금융위기 앞에 개인들이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휩쓸리고 있듯 말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인간사회의 거대한 구조와 흐름은 벗어날 수 없는 전지적인 현실이다.


우리는 이처럼 스스로 일어낸 파도의 거대함 속에 묻혀버리면서도 어떻게든 희망을 끈을 잡고 끊임없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렇게 불가항력의 힘의 일부로서, 그리고 그 앞의 위태한 개인으로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현대사회 안에서의 인간의 경험은 이처럼 본질적으로 숭고미에 닿아있다.


 


장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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