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라
故장수현 관장 추모 1주기 기획전
장수현 . 김흥수
< 예술의 영원한 동반자 >
2013.10.17-12.07
2013. 10. 17. 3pm opening
CSP111artspace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188-55 3층
02.3143.0121
故 장수현, 김흥수 예술의 영원한 동반자를 추모하며
조성지 (미술비평, CSP111아트스페이스 디렉터)
“우리나라 우리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민족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예술가들은 우리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감각을 찾아내어 독특한 개성으로 표현하며 우리의 것을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우리 예술가를 통해 체계적인 멀티 감각과 사고를 키우고, 우리의 예술과 더불어 자긍심을 느끼며 주체적으로 성장해 나아갈 때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문화강국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인 우리의 예술가와 어린이들을 사랑으로 지켜봐야 합니다.”
故 장수현 관장(1962-2012). 어린이들에게 우리 문화와 예술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며 예술영재육성을 위한 창의교육에 열성을 다했던 그녀. 우리의 예술가 김흥수 화백(1919- )과 그의 예술세계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그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확신을 가지고 세상에 알리는 데 젊은 날의 열정과 예술혼을 바쳐온 그녀. 한평생 김흥수 하모니즘의 동반자로서 김흥수 화백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을 지켜온 그녀가 작년 늦가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故 장수현 관장과 김흥수 화백의 인연, 그리고 하모니즘의 동행은 그녀의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가 덕성여자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화가의 길을 준비하던 80년대는 보수와 개혁, 변혁과 안정이라는 상반된 욕구가 치열하게 맞서 충돌하던, 소위 격동의 시기이다. 전세계적으로 남북 이념과 동서 문화가 첨예한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가운데, 우리 미술계는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고급문화와 하위문화, 엘리트주의와 민중의식, 전통과 혁신, 추상과 구상, 물질과 정신, 전통매체와 뉴미디어실험 등에 관한 새로움의 담론을 열망하고 모색하는 다양한 미술이념과 사조, 운동이 뜨겁게 각축을 벌이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대 현실과 예술가의 현실 앞에, 자신의 신념에 막연한 희망을 걸고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젊은 화가의 현실. 예비화가 장수현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였고, 당돌하게 문제를 제기하며, 의욕적으로 자신의 해답을 구하려고 몸부림쳤다. 그리고 암중모색의 길을 헤매던 그녀에게 한 예술가가 빛처럼 다가왔다. 그녀는 김흥수의 회화세계에 매료되었고 그녀의 비평적 직관은 그의 하모니즘, 음양조형주의(陰陽調型主義)를 주목했다.
구상과 추상, 객관과 주관, 물질과 정신 등 양극단의 요소들을 충돌 병치시키며 한 데 어우러진 하모니즘 회화. 동양의 음양사상을 바탕으로 서구 사유체계에서의 개념, 정의상의 이율배반과 모순, 그리고 여러 형태의 대립적 갈등을 오히려 이질요소들 간의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는 창작과정으로 이해한 작가적 성찰이 담긴 조형론(造型論)이자 예술론(藝術論). 대체로 20-30대 젊은 예술가들의 출사표와 같은 선언과 달리, 60을 앞둔 김흥수 화백이 1977년 미국 IMF 갤러리 전시타이틀로 명명한 하모니즘과 음양조형주의(陰陽調型主義) 선언은 한국과 일본, 유럽과 미국 화단을 두루 거친 작가의 통찰과 비약적 도약이 구현해낸 괄목할만한 예술 성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20대 미술학도 장수현의 비평적 판단은 옳았고, 그녀의 예술적 안목은 좋은 몫을 택했다. 그녀의 선택은 확실히 탁월했다. 그녀는 김흥수 화백과 그 예술세계를 동경하며 자신의 예술적 신념으로 확신하고 따랐으며, 김흥수 화백 역시 그런 제자 장수현의 꿈과 재능을 아끼고 존중하였다. 그렇게 사제의 만남에서 부부의 연으로 사랑을 키워갔다. 43세의 나이차를 극복할 만큼 서로 사랑했던 김흥수 화백과 제자 장수현의 결혼은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세간의 화제가 되어왔다. 하지만, 실상 현실은 그녀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다. 그녀는 오해와 편견의 시선들 속에 부러움과 질투, 놀라움, 신비하고 신기한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부모와 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 역시 혼자서 감당해야할 그녀의 현실이었다. 게다가 국내외 근현대미술에서 독보적 개성과 예술적 신념으로 우뚝 선 예술가, 이미 명성을 얻은 노대가의 아내로서의 삶은 화가로의 길을 다지기 위한 유학도, 자신만의 작업시간도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30대의 장수현은 김흥수 화백과의 결혼 당시보다 더 과감하고 용감한 결단을 내렸다. 타고난 성품이겠지만, 그야말로 철저하게 자신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예술혼과 열정을 김흥수 화백과 예술세계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일에 몰두하고 집중했다. 이내 그녀의 헌신과 정성에 대한 보답처럼, 국내외 유명 미술관에서의 <김흥수 하모니즘> 개인전이 줄이어 성사되었다. 동시대예술가에게는 전시가 허락되지 않을 만큼 문턱이 높은 프랑스 파리 뤽상부르미술관(90), 러시아 쌍뜨 페테르부르 에르미타쥬 미술관과 모스크바 푸쉬킨 미술관(93), 한일교류 평화미술제(96-98)와 김흥수·히라야마이꾸오2인전(2001-02)의 초대를 받았다. 김흥수 화백은 <김흥수 하모니즘> 초대 개인전을 통해 왕성한 창작활동을 과시하였고, 故 장수현 관장은 기획자로서, 미술경영인으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또 다른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며, 그야말로 음양조형(陰陽調型)의 하모니즘을 삶으로 실천해나갔다.
故 장수현 관장은 국내외 초대개인전을 기획, 총괄진행하고, 각종 공식석상의 일정과 업무를 수행하며 동분서주 하는 가운데, 1999년부터는 김흥수 미술관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녀의 미술현장 경험은 김흥수 하모니즘의 가치와 의의를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김흥수 화백과 함께 한 하모니즘의 신념에 확신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김흥수 하모니즘의 음양조형(陰陽調型)을 창의교육의 핵심요소로 주목하여 김흥수 어린이영재미술교실을 특화 교육프로그램으로 기획, 운영하였다.
비록 화가의 꿈은 미쳐 펼쳐보지 못했지만, 바보처럼 우직하다 싶을 만큼 묵묵히 인내하며 세상을 향해, 우리 어린이들의 미래를 향해, 우리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한 예술가 김흥수 화백을 향해 미술계의 그림자 역할을 도맡아했던 그녀. 김흥수 화백과의 사제의 만남, 그리고 부부의 인연을 넘어서, 우리 미술계에서 전시기획자, 미술관 경영인, 교육자로서 제 몫을 하며 제 길을 찾아 선 그녀의 삶. 자신에게 쏟아졌던 세상의 곱지 못한 시선들마저 오히려 한결같이 사랑의 시선으로 돌려주었던 그녀의 마음. 진실한 사랑과 신의로 살아온 삶의 징표처럼 사진 속 故 장수현 관장의 미소는 의연하고 당당하며 온화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온 삶으로 보여준 그녀의 겸손과 온유, 인내의 수양이야말로 아름다운 음양조형(陰陽調型), 하모니즘의 진정한 실천일 것이다. 故 장수현 관장의 작고 1주년을 추모하며, 그녀가 평생의 예술혼을 바쳤던 문화예술과 예술영재교육, 예술가에 대한 애정 어린 신념과 비전에 하모니즘의 새로운 희망을 기대해본다.
“우리나라 우리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민족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예술가들은 우리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감각을 찾아내어 독특한 개성으로 표현하며 우리의 것을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우리 예술가를 통해 체계적인 멀티 감각과 사고를 키우고, 우리의 예술과 더불어 자긍심을 느끼며 주체적으로 성장해 나아갈 때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문화강국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인 우리의 예술가와 어린이들을 사랑으로 지켜봐야 합니다.”
故 장수현 관장(1962-2012). 어린이들에게 우리 문화와 예술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며 예술영재육성을 위한 창의교육에 열성을 다했던 그녀. 우리의 예술가 김흥수 화백(1919- )과 그의 예술세계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그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확신을 가지고 세상에 알리는 데 젊은 날의 열정과 예술혼을 바쳐온 그녀. 한평생 김흥수 하모니즘의 동반자로서 김흥수 화백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을 지켜온 그녀가 작년 늦가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故 장수현 관장과 김흥수 화백의 인연, 그리고 하모니즘의 동행은 그녀의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가 덕성여자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화가의 길을 준비하던 80년대는 보수와 개혁, 변혁과 안정이라는 상반된 욕구가 치열하게 맞서 충돌하던, 소위 격동의 시기이다. 전세계적으로 남북 이념과 동서 문화가 첨예한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가운데, 우리 미술계는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고급문화와 하위문화, 엘리트주의와 민중의식, 전통과 혁신, 추상과 구상, 물질과 정신, 전통매체와 뉴미디어실험 등에 관한 새로움의 담론을 열망하고 모색하는 다양한 미술이념과 사조, 운동이 뜨겁게 각축을 벌이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대 현실과 예술가의 현실 앞에, 자신의 신념에 막연한 희망을 걸고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젊은 화가의 현실. 예비화가 장수현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였고, 당돌하게 문제를 제기하며, 의욕적으로 자신의 해답을 구하려고 몸부림쳤다. 그리고 암중모색의 길을 헤매던 그녀에게 한 예술가가 빛처럼 다가왔다. 그녀는 김흥수의 회화세계에 매료되었고 그녀의 비평적 직관은 그의 하모니즘, 음양조형주의(陰陽調型主義)를 주목했다.
구상과 추상, 객관과 주관, 물질과 정신 등 양극단의 요소들을 충돌 병치시키며 한 데 어우러진 하모니즘 회화. 동양의 음양사상을 바탕으로 서구 사유체계에서의 개념, 정의상의 이율배반과 모순, 그리고 여러 형태의 대립적 갈등을 오히려 이질요소들 간의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는 창작과정으로 이해한 작가적 성찰이 담긴 조형론(造型論)이자 예술론(藝術論). 대체로 20-30대 젊은 예술가들의 출사표와 같은 선언과 달리, 60을 앞둔 김흥수 화백이 1977년 미국 IMF 갤러리 전시타이틀로 명명한 하모니즘과 음양조형주의(陰陽調型主義) 선언은 한국과 일본, 유럽과 미국 화단을 두루 거친 작가의 통찰과 비약적 도약이 구현해낸 괄목할만한 예술 성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20대 미술학도 장수현의 비평적 판단은 옳았고, 그녀의 예술적 안목은 좋은 몫을 택했다. 그녀의 선택은 확실히 탁월했다. 그녀는 김흥수 화백과 그 예술세계를 동경하며 자신의 예술적 신념으로 확신하고 따랐으며, 김흥수 화백 역시 그런 제자 장수현의 꿈과 재능을 아끼고 존중하였다. 그렇게 사제의 만남에서 부부의 연으로 사랑을 키워갔다. 43세의 나이차를 극복할 만큼 서로 사랑했던 김흥수 화백과 제자 장수현의 결혼은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세간의 화제가 되어왔다. 하지만, 실상 현실은 그녀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다. 그녀는 오해와 편견의 시선들 속에 부러움과 질투, 놀라움, 신비하고 신기한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부모와 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 역시 혼자서 감당해야할 그녀의 현실이었다. 게다가 국내외 근현대미술에서 독보적 개성과 예술적 신념으로 우뚝 선 예술가, 이미 명성을 얻은 노대가의 아내로서의 삶은 화가로의 길을 다지기 위한 유학도, 자신만의 작업시간도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30대의 장수현은 김흥수 화백과의 결혼 당시보다 더 과감하고 용감한 결단을 내렸다. 타고난 성품이겠지만, 그야말로 철저하게 자신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예술혼과 열정을 김흥수 화백과 예술세계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일에 몰두하고 집중했다. 이내 그녀의 헌신과 정성에 대한 보답처럼, 국내외 유명 미술관에서의 <김흥수 하모니즘> 개인전이 줄이어 성사되었다. 동시대예술가에게는 전시가 허락되지 않을 만큼 문턱이 높은 프랑스 파리 뤽상부르미술관(90), 러시아 쌍뜨 페테르부르 에르미타쥬 미술관과 모스크바 푸쉬킨 미술관(93), 한일교류 평화미술제(96-98)와 김흥수·히라야마이꾸오2인전(2001-02)의 초대를 받았다. 김흥수 화백은 <김흥수 하모니즘> 초대 개인전을 통해 왕성한 창작활동을 과시하였고, 故 장수현 관장은 기획자로서, 미술경영인으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또 다른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며, 그야말로 음양조형(陰陽調型)의 하모니즘을 삶으로 실천해나갔다.
故 장수현 관장은 국내외 초대개인전을 기획, 총괄진행하고, 각종 공식석상의 일정과 업무를 수행하며 동분서주 하는 가운데, 1999년부터는 김흥수 미술관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녀의 미술현장 경험은 김흥수 하모니즘의 가치와 의의를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김흥수 화백과 함께 한 하모니즘의 신념에 확신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김흥수 하모니즘의 음양조형(陰陽調型)을 창의교육의 핵심요소로 주목하여 김흥수 어린이영재미술교실을 특화 교육프로그램으로 기획, 운영하였다.
비록 화가의 꿈은 미쳐 펼쳐보지 못했지만, 바보처럼 우직하다 싶을 만큼 묵묵히 인내하며 세상을 향해, 우리 어린이들의 미래를 향해, 우리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한 예술가 김흥수 화백을 향해 미술계의 그림자 역할을 도맡아했던 그녀. 김흥수 화백과의 사제의 만남, 그리고 부부의 인연을 넘어서, 우리 미술계에서 전시기획자, 미술관 경영인, 교육자로서 제 몫을 하며 제 길을 찾아 선 그녀의 삶. 자신에게 쏟아졌던 세상의 곱지 못한 시선들마저 오히려 한결같이 사랑의 시선으로 돌려주었던 그녀의 마음. 진실한 사랑과 신의로 살아온 삶의 징표처럼 사진 속 故 장수현 관장의 미소는 의연하고 당당하며 온화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온 삶으로 보여준 그녀의 겸손과 온유, 인내의 수양이야말로 아름다운 음양조형(陰陽調型), 하모니즘의 진정한 실천일 것이다. 故 장수현 관장의 작고 1주년을 추모하며, 그녀가 평생의 예술혼을 바쳤던 문화예술과 예술영재교육, 예술가에 대한 애정 어린 신념과 비전에 하모니즘의 새로운 희망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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