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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7~12. 14 'Nature VS. Nature_유근영과 송창의 서로 다른 자연' 전

송성석


전 시 명 : <Nature VS. Nature _ 유근영과 송창의 서로 다른 자연>展
참여작가 : 송창, 유근영 (총 2인)
전시기간 : 2014년 10월 17일(금) ~ 12월 14일(일)
개막행사 : 10월 23일(목) 오후 6시 / 퍼포먼스 <Underneath The Stars> (유정희)
전시기획 : 이윤희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연구실장)
전시장소 : 화이트블럭 1~5전시실/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72.
관람시간 : 월요일-금요일:10:30am-6:30pm/토요일-일요일, 공휴일: 10:30am-7:30pm
전시문의 :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Tel. 070-7862-1147 / 031-992-4400 


 


유근영과 송창의 서로 다른 자연



동서양의 각 문화권에 특유한 회화의 규범에 따라 자연을 그리는 목적과 기법은 상이하지만, 인간이 그려내는 자연에는 늘 모종의 의미가 부여되어 왔다. 인간이 바라보는 자연은 인간이 발 디딘 지구의 표면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라 이름해야 마땅할 것이지만, 미술의 역사 속에서 자연의 묘사는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중립적 배경이 아니라 그 표면 아래 숨겨진 은유와 상징을 드러낼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완성되는 것들이었다. 자연은 때로는 신의 섭리를 드러내고, 인간이 따라야 할 가치를 구현하거나, 인간적 현세와 대비되는 유토피아를 상징해 왔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인간을 둘러싼 전체적 환경은 자연보다는 인공물들이 구축해 왔고, 자연에 대한 의미부여와 묘사는 전시대에 비해 주된 지위를 잃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연, 혹은 자연의 개념을 붙잡고, 아직 다 소진되지 않은 그 의미를 탐색하는 작가들이 존재하는 바, 오늘 우리 곁에서 아직도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으로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의미의 일단을 살펴보는 것이 이번 전시의 목적이다.
유근영과 송창은 각각 1948년생, 1952년생인 60대의 화가들이며, 이들의 작품은 모두 자연이라는 테마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두 작가는 화업을 쌓아오는 동안 서로 생활반경에서든 전시를 통해서든 연관된 일이 없고 서로 만나질 상황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근영의 경우, 그의 젊은 시절 화단을 휩쓸었던 단색화류 모더니즘으로부터 벗어나 구상/추상의 개념을 오가는 작업을 지속해 왔던 작가이고, 송창은 1982년의 임술년 그룹 활동을 시작으로 민중미술로 범주화할 수 있는 사회적 의식을 표명해 왔던 작가이다. 비슷한 세대의 두 작가가 자연에 대한 포커스를 가지고 있었지만 너무도 다른 문제의식과 위치에서 시간을 쌓아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만난 적 없는 그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두 작가가 가져온 문제의식에 따른 모드 전환이 필요하다.
유근영이 그리는 자연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자연이라고 인지하는 것이 놀라울 만큼 추상에 가깝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그림 속에는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이 없거나 모호하다. 그가 보여주는 자연은 사실성에 기인하기보다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구체성에 근거하여 추상적인 것을 파악하려고 하는 습성에 기대고 있다. 그의 작품이 대단히 추상적이라 하더라도 대개 배경이 되는 부분과 형상이 되는 부분이 구분되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은 형상의 이미지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무엇인가를 떠올리려 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작품의 형상은 파초 같고, 어떤 것은 꽃밭 같다가, 또 어떤 것은 점멸등이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인 것 같고, 또 어떤 경우는 가을의 낙엽이 떨어지는 장면 같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형태의 유추는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적 경험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동일한 이미지에서 전혀 다른 것을 연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형태와 구도가 대단히 무작위적이어서 어떻게 보면 같은 그림 내에서 존재하는 이미지들조차도 서로 필연적 연관관계 없이 예기치 않게 나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마치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이 인간적 질서에 복종하지 않고 생성되는 광경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의 작업이 분명 자연의 어떤 부분을 연상케 하지만, 그는 캔버스를 들고 실제 풍경으로 나가거나 최근 많은 작가들이 하듯이 사진을 근거로 하여 그리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의 풍경에 면하여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화실에서 벽을 쳐다보며 그린다. “나는 매일 풍경화를 좁은 나의 화실에서 벽을 쳐다보며 그린다. 어릴 때 보았던 길가의 민들레, 어저께 보도블럭 사이를 기막히게 뚫고 나와 피어 있던 강아지풀, 오늘 TV에서 보았던 갈대의 숲, 비틀즈 노래에 나오는 노르웨이의 숲을 그린다. 시간을 그린다. <옥토퍼스의 정원>, <페니레인>도 그린다”는 그의 자서(自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그려내는 <엉뚱한 자연(Odd Nature)>은 자연에 직면한 경험적 근거에서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지각체험의 어느 부분에 이어져 있는 정도라고 말할 수 있으며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에 따라 생성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내면화된 작가의 경험들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캔버스를 만나 우연히 펼쳐지는 실존적 사유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유근영의 작품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은 언어화하기 어려운, 비개념적인 감흥들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선과 색채의 무수한 조합이 만들어낸 유려한 시각적 감흥은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더 비언어적 자연의 세계를 연상시키는 효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반면 송창의 풍경들은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특정 장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사실 그는 1980년대에 우리나라 남북의 분단과 연관된 풍경들, 분단이 초래한 사회구조와 연관된 장면들의 풍경을 그리는 것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는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라기보다는 인간이 개입되어 있는 자연, 인간의 삶과 맞닿아 있는 자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와 그의 풍경화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표면 너머로 숨겨지고 풍경 그 자체가 부각되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가 이때부터 그려내고 있는 검거나 붉은 들판, 새벽녘이나 어스름 저녁에 볼 수 있는 푸른 빛 대기, 하늘로 치솟은 푸르거나 붉은 나무, 앞이 보이지 않는 빽빽한 숲길에 사람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간간이 풍경 속에 숨겨진 것들, 이를테면 감시탑이나 도로표지판, 알 수 없는 불길 등에서 그가 풍경에 담는 의미의 포커스가 한 겹 베일을 벗기도 하지만, 대체로 매우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들이다.
그는 여행이나 답사를 통해 자신의 눈으로 본 광경을 캔버스에 담는데, 그의 주된 전략은 이미지의 강렬화인 것으로 보인다. 한 그루의 나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에서 그는 어떤 징후를 발견하는데, 이러한 감흥은 앞서 언급한 그의 현실 인식과 연관되어 있다. 삶 속에 폭력적인 양상으로 개입되어 있는, 이미 존재하는 현실은 개인적 세계관의 여부에 관계없이 강제되고, 일정한 경계에 둘러싸인 삶의 환경을 떠나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1980년대의 민중미술은 우리를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소리높인 발언으로 당시의 정치상황 속에서 민중에 대한 정치적 계몽 혹은 연대를 표방했지만,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되었던 일종의 회고전인 <민중미술 15년>전을 비롯한 몇몇 전시들을 계기로 급격히 역사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적 현실, 특히 분단의 현실은, 우리 사회가 가진 속도감 있는 변화의 과정 중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고, 여전히 어느 순간 예기치 않게 드러날지 모르는 잠재태로 남아 있으며, 여전히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인식과 판단을 어떠한 방식으로, 어떠한 예술적 표현으로 드러낼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는, 개별 작가들의 실험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는 상황이다.
송창은 이러한 상황에서, 분단과 그 구조가 미치는 삶의 양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속하면서도, 그 표현의 문제에 있어서 크게 방향을 선회하였다. 소재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그는 우리의 선택을 넘어서 이미 존재하는 세계인 자연으로 눈을 돌려, 자연으로부터 다시 인간을 되돌이켜 보는 역설적 사유의 방식을 취했다. 그가 그려내는 지극히 아름다운 자연, 임진강 부근의 검게 얼어붙은 땅, 남도의 붉은 땅, 그곳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들, 더할 수 없이 고혹적으로 피어나는 꽃들은, 그 속에서도 여전히 혼란을 겪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대척점에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의 눈에 비친 자연은 더 강렬하게 아름답고, 나아가 슬프고 처연하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화실에는 현재 이러한 풍경화의 양상과는 사뭇 다른, 다시 뚜렷한 문제의식을 표명하는 작품들, 풍경을 표방하고 있지만 풍경을 넘어서고 있는 작품들이 진행 중이어서, 그 추이가 사뭇 궁금하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이 ‘자연’을 계기로 삼아 담아내는 세계는 이렇게도 상이하다. 이들의 작품 앞에 서는 관객들은 때로는 현실의 강렬한 인식으로, 때로는 현실에 중첩된 신비스러운 그림자로 자연을 되새기게 될 것인데, 인간을 둘러싼 삶의 공간으로서의 자연은 사실 서로 상이해 보이는 이 두 세계를 모두 포함함으로써 완전해질 것으로 보인다. 예술에 있어서 실제와 상상의 세계, 현실과 초월의 세계는, 어쩌면 예술만이 인간에게 선사할 수 있는 조화로운 전체성이기 때문이다. 


이윤희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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