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엄
작가노트 [부유하는 껍데기]
껍데기들이 파도 위에서 부유하고 있다. 나의 껍데기이기도 하고, 현대인들의 껍데기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어느 새부턴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검열하며 살아가고, 현대에는 검열 받아야 할 너무나도 많은 가치관들이 다양한 국면에서 충돌하고 있다. 각자의 입장에서 진리라고 믿는 것들이 부딪히고 파도가 되어 개인의 생각을 휩쓸어간다. 결국 표면에 부유하는 것은 껍데기들이다.
개인의 자유와 공중보건의 안전, 환경을 파괴하는 플라스틱 쓰레기와 전염병을 막기 위한 일회용 마스크들, 여성과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범죄들과 무고한 이들까지 사지로 내모는 여론재판 등. 우리는 어느 한 쪽의 편에 서 있기를 요구받고, 다른 한 쪽의 비난을 감내할 준비를 해야 한다. 각각의 편은 저 마다 본인이 진정한 진리임을 설득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과연 완전한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 이 시대에 제일 선하고 순수한 ‘주의자’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알 수 없다. 저 마다의 진리가 화합하지 못하고 부딪혀 으스러지고, 서로를 교활하고 간사한 형태로 묘사한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나 선한 형태로 묘사되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껍데기인 채로 파도 속에 나를 맡기면 편안히 떠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선하고 좋은 진리라는 것은 없다. 더군다나 어떤 개체 속에 섞여서, 누군가에게 내 진리를 맡긴 채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파도를 그리는 것은 이러한 나의 다짐을 기록하는 일기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 편지이기도 하다. 모두 자기만의 삶의 방식이 있으니 강요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그림을 그리는 방식도 격하거나 즉흥적이기 보다는 부드럽고 편안하게, 순서에 맞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의 이야기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좋아해주길 바라면서 각각의 그림마다 숨겨진 메시지를 저 마다의 오브제로 표현한다. ‘진리’를 통한 구원을 간절히 원하는 손, 어딘가 높은 곳으로 향하는 계단, 그 계단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소라껍데기’, 파도의 영향이 끼치지 않는 상상의 공간 등 저 마다 상징하는 의미들이 숨겨있는 오브제들이 파도와 함께 평면을 구성한다.
파도와 오브제를 그리기 위해 선택하는 재료도 거칠거나 강렬하기보다는 잔잔한 파스텔톤의 석채, 인공석채, 봉채 등을 린넨 천 위에 얹어내며 부드러운 텍스쳐로 그려지도록 한다. 전통적 양식에서 차용한 파도의 형태와 전통 채색화를 기반으로 시도하는 여러 가지 피그먼트 물감들은 나의 이야기가 무례하지 않고 편안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도와준다. 특히 최근의 작품들에는 백토를 이용한 밑작업을 통해 더 몽환적인 질감이 만들어졌다. 따뜻하고 감미로운 색채와 묘한 수수께끼 같은 상징물들이 재미있는 역설과 질문으로 빚어져 관객에게 가닿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세상은 어려운 질문을 맞닥뜨리고 스스로 대답해야만 하는 미지의 여행지다.
삶의 길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1인은 우리 자신이다.”
- 홍대선,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 푸른숲(2018)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등 세계의 진리를 찾고자 했던 철학자들은 모든 당연한 것들을 의심하면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친구이자 적인 자기 자신을 의지했다. 바쁘고 정신 없는 현대 사회 속에서 언제나 철학자처럼 살기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부딪히는 파도 사이를 하릴없이 부유하며 살기보다는 나 자신의 의지대로 파도 위를 넘나들며 살고 싶다. 그런 이야기가 나의 그림을 통해 잔잔히 전달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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