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혁발
자기들만의 지적 놀음
전시 주제와 소주제들, 우리말로 해도 되는데 굳이 사용하는 외래어들, 어디서 많이 보던 익숙한 이미지다. 꼭 이래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 예술감독에 김선정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곤 금방 이해가 된다. 그녀가 운영하는 아트선재센터에서 보내오는 전자우편물의 이미지와 너무 흡사하다. 이름 모를 외국 작가들과 현학적인 문구들, ‘라운지 프로젝트’, ‘아티스트 토크’ 같은 외래어의 남발, 이것이 내 머릿속에 박혀있는 아트선재센터의 이미지이다.
그래서 아트선재센터의 전시들은 나에게는 대부분 생경하고 친밀성을 가질 수 없었다. 가진 자, 기득권자들의 놀이판이라는 느낌이 물씬 올라오게 만들기 때문이다. 김선정이 누구인가? 티브이 광고에서 그녀를 처음 인지하기 시작했던 때는 대우가 한창 ‘세계 경영’을 부르짖을 때 아니었던가? 박근혜가 과거를 문제 삼지 말라고 했는데, 그 과거가 현재의 그녀 안에 있고, 미래의 그녀에도 그 잘못된 과거가 펼쳐질 것이 예견되므로 문제가 있듯이, 재벌의 딸인 김성주가 자신은 일반적 재벌의 딸처럼 지원을 받지 않았기에 일반 재벌과 다르다주장하지만 박근혜 옆에서 내뱉는 말들은 그 태생적 한계를 버리지 못함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김선정의 예술 활동도 부자들의 높은 담벼락 같아서 가보지도 못하고 멀리서 쳐다보고 마는 그런 괴리감을 준다.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아트선재센터의 기획전을 모아놓은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트선재센터의 전시와 문화 활동들은 외연 확대와 한국미술발전에 의미 있는 활동을 한다고 본다. 하지만 나랏돈으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적 전시행사에서 소수의 화랑이 담담해야 할 역할을 국가적 전시에 유사하게 펼친다는 것은 무리수라 본다.
‘지구촌’을 말하는 시대이기는 하나 인류 공통의 테마를 가지고 펼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지역, 다른 나라의 작가들 자체를 모아놓은 것이 ‘통합’이고 의미 있다고 항변하는 전시이니, 이건 전문적이지 않은 많은 관람객들을 무시하는 처사일 뿐이다. 난해한 기획의 변을 펼치면서 다양한 지역, 나라의 역사와 아픔을 바라보라고 강요당하는 느낌이다. 우리 입맛에 안 맞는 외국음식을 쫙 펼쳐놓고 먹지 않는다고 면박을 주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이 전시는 학식과 정보, 사회적 지위를 가진 미술전문집단, 그 소수의 예술권력자들의 예술놀음, 지적놀음의 판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누구를 위한 전시인가
이러한 기획에서 출발하다보니 전시를 보고 난 느낌은 잘난 이들의 대중 무시, 독선, 문화사대주의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기획의도 중에 ‘친밀성’이라는 단어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쉽게 알아먹지도 못하는 외래어들을 왜 남발하는가? ‘둥근 탁자’라는 이해하기 쉬운 말이 있는데도 ‘라운드 테이블’이라는 말을 굳이 쓰는 뇌구조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워크스테이션’, ‘큐레토리얼 실천’, ‘전자 저널’, ‘로그인, 로그아웃’등의 외래어와 ‘정치경제적 봉기들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 조직화, 집단성에 근거한 예술적정치적 저항’,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마주치는 협업관계’, ‘역사를 일련의 가변적 국면들로 재고하게 하고’, ‘시공간에 미치는 유동성의 영향력’, ‘국제 비엔날레의 문화정치학과 미학적 정치학’등의 문장들, 이글을 읽는 독자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홍보물에 이들은 “큐레이팅을 하는 행위는 통합, 즉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련의 충돌이다.”고 강변한다. 6명의 큐레이터가 만든 전시가 ‘통합’이고 이것이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인데, 얼토당토, 아구가 맞지도, 실천도 이뤄지기가 힘든 말이다. 통합이란 어떤 분명한 목적이 있어도 힘든 것인데, ‘둥근 탁자’라는 이들이 얘기하는 ‘정치회담을 연상’시키는 행위 자체로 통합을 얘기하는 건 모순이다. 무엇을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르게 자란 사람끼리 한번 자리를 만들어 모인 것이 통합이고 그것 자체가 변화로 가는 충돌이 된다니 이런 궤변이 어디 있는가?
단체버스를 타고 오는 어린 학생들과 일반 대중들이 관람객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텐데, 우리 같은 미술인도 벅찬 기획의도를 이들이 쉽게 이해하기 만무하다.
국가 돈으로 이뤄지는 전시는 목적을 보다 더 정확히 가져야 한다. 개인적 소견으로는 미술인보다도 일반국민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한다고 본다. 광주비엔날레의 성공적인 모습이란 이 전시를 통해 미술애호가가 늘고 그들이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다시 전시장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전시가 되어야 한다. 먼 길을 마다하고 찾아온 관람객들에게 예술의 본령인 ‘정서적 반응’을 일으켜주어야 한다. 예술이 대중을 앞서 이끄는 것이라 해서 거만하게 앞서서 성큼성큼 가버리는 듯 하면 정말 미술인들만 모이는 초라한, 공명이 없는 행사가 돼 버리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서도호의 탁본작업이나 안규철의 작업, 총포류로 악기를 만든 페드로 레이야스, 우순옥의 작업은 기억에 남았다. 다른 많은 관람객들은 가슴 속에 어떤 작품의 감동을 담아갔을까하는 기획자의 고민이 있어야 한다.
설치작품과 영상미술이 주된 작품으로 전시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런 전시작품들이 첨단인양, 현대미술의 모든 것인 양 호도 되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린 학생들은 설치나 영상작업을 하는 작가만 현대미술작가 대접을 받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미래의 작가들에게 너무 편향적인 것만 보여주는 것이다. 주요 관람객인 학생과 일반인들을 생각한다면 평면작품과 입체작품들도 어느 정도의 자리를 차지하여 의미 있는 작업임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면 교감도 좀 더 쉽게 이뤄질 것이 아니겠는가?
광주비엔날레의 위상
이번 안내홍보물에는 ‘광주비엔날레에 대해’라는 글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각광받는 국제 현대미술 비엔날레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라고 적혀 있다. 과연 그럴까? 이렇게 쓰고 싶은 심리상태가 궁금해진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절대 그럴 리 없을 텐데. 세계미술사에 주목받는 전시라면 책이나 전문잡지의 글을 통해 세계미술사에 기록되어져야 한다. 과연 그랬는가? 또 세계미술 발전에 일조한 어떤 역할들이 있었던가 묻고 싶다. 가진 것 없는 놈이 부자인 척하는 꼴은 아닌가?
세계적으로 각광받는다면 미술관계자들이 전시를 하고 싶어 하고, 여기선 한 전시를 대단한 경력으로 생각해야한다는 것을 말한다. 또 많은 미술관계자들이 이 전시를 보고 싶어 해야 한다. 외국에서 전시회를 보러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이 많이 있다면 정말 국제적 위상이 높은 것이 되겠지만, 46만 명의 관람객 중 외국인이 몇% 였을까?
G20행사를 유치하면 몇 십 조의 경제이익이 있고, 국가적 위상이 높아진다고 공영방송을 통해 각 참여국에 대해 몇 시간씩 특집방송까지 하는 난리를 부리는 이명박정권 같은 우물 안 개구리식 아둔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광주비엔날레는 세계 수많은 국가들이 만드는 전시 중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나라에도 몇 개의 비엔날레가 있지 않은가? 비엔날레라는 말도 단지 이년에 한번 한다는 의미밖에 없는데 마치 특별한 것인 양, 대단한 것인 양 뻐기는 것은 허망한 것이다.
외국의 작가들한테 한국은 ‘호구’라는 얘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자기돈 한 푼 안들이고 전시에 참여할 수 있으며, 대우도 좋다고, 더구나 든직한 상금까지 줄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베니스비엔날레도 우리는 우리 돈으로 참여한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전시하는 공간인 한국관도 우리 돈으로 지었다. 외국의 이름난 전시는 외국작가를 초대할 때, 모든 경비를 대주는 100% 초대보다 참가하려는 국가나 작가, 기획자로부터 참가신청서를 받고 일정 경비(왕복비행경비 등)를 참여자가 부담하는 경우가 더 많다. 동방예의지국이라하여 너무 퍼주기식으로 한다고 위상이 올라가지 않는다. 외국 작가나 외국 큐레이터를 마구 끌어들인다고 해서 국제적 위상이 올라가는 건 아니다. 베니스비엔날레의 감독 했던 사람을 쓰면서 그 명성에 기대려는 치졸함 같은 것은 빨리 버렸으면 좋겠다. 쓸데없는 명성에서 내려와 실속을 챙기고, 내실을 다져야 한다.
어디로 향해야 하나
하나,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 미술관의 역할 중에 교육적 측면이 주요한 일이듯이 광주비엔날레 같은 국가적 행사도 교육의 의미를 중요시해야 한다. 설명원이 한 갤러리의 두서너 작품만 소개하고 지나가는 것은 관람자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다. 각 전시장마다 설명자를 두어 듣고 싶고 알고 싶어 하는 관람자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줘야 한다. 일반 국민들의 미술애호를 넓힐 수 있는 길이고, 계속해서 광주비엔날레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예술을 통한 국민수준을 높이고, 아름답고 질 높은 삶에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 국내작가들이 발전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밀레나 고흐, 피카소, 로댕의 작품에 비싼 값을 치르며 한국에 작품을 가져와 전시해야 하는가? 국내 작가들에게 창작지원금 펑펑 주면서 발표공간을 널찍하게 만들어 주어야하고, 외국작가와 교류의 장을 만들어 줘야하고, 저명한 미술관계자들에게 작품을 보일 기회를 만들어 줘야한다. 초대된 국내외 평론가와 미술사가에게 작품을 보여주고 글을 쓰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 작가들을 세계미술사에 자꾸만 언급되게 만들어야 한다.
95년도쯤 대학원 수업에서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신 선생님이 한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백남준 선생이 한국에 있었으면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절대 백남준 선생 같은 거장이 나타날 수 없다.”고, 이 양반이 틀렸다는 걸 싸이가 증명했다고 본다. 미술계에 싸이현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국내에서 배운 우리 작가가 어떻게 하면 세계적 작가가 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김아타 같은 작가가 많이 만들어지는 장을 자구 넓혀줘야 한다.
하나, 주체적 전시가 되어야 한다. 그럴러면 책임큐레이터는 한국인이어야 한다. 우리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아야한다. 모든 것이 주체적 관점에서 출발되고 진행되어야 한다. 허명에 들떠 비엔날레의 위상 운운하며 외국큐레이터에 의해 전체적 형태가 꾸려지는 전시는 한국에서, 광주에서, 우리 돈으로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전체 틀 안에서 외국인의 관점을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초대할 몇 작가만 초대하고 나머지는 기획공모를 받고 적절히 지원해주는 방법을 찾으면 외국 작가나 기획자의 관심을 끌 수 있고 참여하고픈 의지도 높아지리라 본다. 작가선정의 전권을 외국기획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손에서 주체적으로 최종결정을 한다면 이번 행사처럼 무언지도 잘 몰라 얼떨떨한 이에게 많이 먹으라며 입 안 가득 음식을 들이미는 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한다. 광주비엔날레의 태생이유가 광주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므로 비엔날레를 활성화시켜 광주의 아픔을 다양한 방식으로 치유돼야하므로 미술만 강조되기보다 미술이 불쏘시개가 되어 광주 전체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 관람객을 모아 지역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1회 때 방송 3사가 현장에 진을 치고 방송하는 것까지야 바랄 수 없어도 몇 시간씩의 특별방송을 하여야 한다. 그러면 꼭 외국작가만 잔뜩 모아놓지 않더라도 국내작가 작품을 보여주더라도 얼마든지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으며 흥행이 가능하리라 본다.
돈을 집행하는 공무원들이여, 이제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문화사대주의에 빠진 교수나 전문인에게 중요보직을 주지 말고 한국에서 나름 공부하고 열심히 한 이들에게 역할을 줘라. 이제는 큰 키의 외국인이 입던 연미복을 고치지도 않고 바닥에 질질 끌며 폼 잡는 꼴은 그만 만들었으면 한다. 그래서 정말 내실 있는 전시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체적이 되어 우리가 만드는 것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만의 색깔을 가진 비엔날레가 될 것이고 차츰, 자연스레 국제적 위상을 높아지고 해가 거듭될수록 토실토실 살이 찌는 멋진 비엔날레가 될 것이다.
첨언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중국 허난성현대미술전>도 참 난감한 전시였다. 왜 하필 이때, 이런 수준의 전시를 시립미술관에서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중국 그 넓은 땅에서 1개 성안의 작가들 작품을 가져오니 당연 그럴 수밖에 없지만, 비엔날레와 겹치는 전시기간에 하필 이런 정도 수준의 전시를 끌고 와야 하는지, 뜨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엔날레 본전시관 작품이 빡빡하게 끼워놓은 듯 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는데 본전시장에 가까운 이 시립미술관의 공간을 이렇게 쓰다니 참 답답한 심정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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