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가정을 이처럼 색다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문정현 | 문화비평가
1956년 런던의 한 젊은 예술가가 인디펜던트 그룹의 전시에 출품한, <오늘날의 가정을 이처럼 색다르고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Just What Is It That Makes Today's Home So Different, So Appealing?> 라는 독특한 제목의 콜라주 작품은 현대 팝아트의 시조로 불린다. 이 작품은 현대소비사회로 진입하는 가정의 보편적인 변천사를 드러내며 큰 반향을 낳았다. 소형 청소기와 녹음기가 집 안 곳곳에 놓여있고 거실 한복판에는 텔레비전이 자리하고 있다. 흑백 이미지로 콜라주된 가정 안의 두 남녀는 서로의 다부진 몸매를 마음껏 자랑하고 있다. 왼편 계단의 가정부로 보이는 여성은 갓 등장한 소형 청소기의 흡입기를 위에까지 잡아당기며 수월하게 집안을 정리하고 있다. 창문 밖에는 휘황찬란한 와너스 영화관의 상영작들이 내걸려있고, POP이라 적힌 막대사탕과 FORD 스탠드까지 집안 곳곳은 물질문명이 낳은 총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괴상한 콜라주 작의 주인공인 리차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은 대중문화의 소비성과 쾌락주의를 비꼬고 풍자하는 방식으로 오늘날(50년대)의 가정을 표현했다.
이 후 미국에서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의 주도로 팝 아트는 예술계 전반을 강타하며 공고한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는다. 특히 원한을 품은 내부 직원에게 살해당하기까지 온갖 화제의 중심에 있던 앤디 워홀의 공헌(?)으로 인해 팝 아트는 대중들을 사로잡으며 여타 미술 장르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다시 리차드 해밀턴의 팝아트 작품으로 돌아가서 <오늘날의 가정을 이처럼 색다르고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은 오늘날 팝 아트의 고전에 위치해있다. 그리고 작품에 대한 해석 역시 엇비슷하다. 성적인 대상을 추구하고, 물질화에 집착하며 대량생산적이고 계몽적인 소비문화에 길들여진 대중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해밀턴이 말하고자 한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필자는 그림 안에 콜라주된 텔레비전이나 여타의 대량생산된 상품이 아닌 다른 감춰진 오브제의 발견을 통해서 이 팝아트의 시조에 보다 근원적인 해석을 가해보고자 한다.
우리의 시선을 이 색다르고 흥미진진한 가정의 칸막이에서 벗어나 조금만 위로 이동해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바로 달이다. 문명의 이기 속에 소비지향적으로 변해가는 가정 위에 달이라니 좀 뜬금없지 않은가. 텔레비전과 라디오, 신문과 진공청소기, 막대사탕과 통조림 캔, 근육질의 남성 등은 위 작품을 해석하기 위한 오브제들로 숱하게 언급되어 왔으나 그 전체 공간을 조망하는 캔버스 위의 달은 지금까지 평단으로부터 전혀 주목받지 못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그 달이 그림의 윗 면적을 거대하게 차지하며 또 다른 암묵적 메시지를 내포하는데도 말이다. 아마도 평론가들은 해당 작품에서 달이란 요소를 중요시 여기지 않은 모양이나, 달은 하나의 중요한 복선이 될 수 있는만큼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대상이다.
오늘날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되어가는 여러 공간들을 관찰하며 인류학자 마크 오제(Marc Auge)는 "비장소 non-places" 라는 개념을 도출해냈다. 그곳이 뉴욕의 케네디 공항이던 런던의 히드로 공항이든, 혹은 도쿄의 나리타 공항이든 간에 그 모든 공간들은 모두 똑같은 화장을 하고 있다. 그 장소가 가진 고유한 흔적들이 사라진 채 복제화되어 있는 죽은 공간들, 오제는 이런 공간을 "그 자체로 인간적인 장소 anthropological places가 되지 못하는 공간" 이라고 말한다. 공항이든 백화점이든 영화관이든 혹은 그 공간 내의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는 맥도날드나 스타벅스까지 현대인들은 모두 '비장소'에서 삶의 단편들을 소비한다.
해밀턴이 단순히 물질문명 사회의 폐해에 초점을 맞췄다면 카메라의 초점과 위치를 가정 내의 무대 안으로 들여왔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교묘하게 캔버스의 간극을 조정하는 해밀턴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 검은 배경 앞에 놓인 이 연극적 무대에 사람들의 시선을 철저하게 고정시킴으로써 그가 야심차게 구상해놓은 무대 저편의 달은 은폐되도록 하는 의중이다.
오제는 교통 수단과 그 수단이 이루어지는 장소, 또는 운송 네트워크 등을 비장소의 전형적인 예로 든다.
항공로, 지하철 역, 레저파크, 호텔 체인 그리고 비행기, 열차 등의 운송수단 등이 모두 비장소의 좋은 본보기들이다. 해당 공간들은 모두 사람들이 스쳐지나가는 '임시적' 성격이 짙다. 외제는 위의 예시들과 비교하여 가정과 주거 공간을 비장소의 대척점인 '장소' 에 놓고 있다. 하지만 리차드 해밀턴의 작품에서 보듯이 이제는 가정의 그러한 경계마저도 와르르 무너지는 실정이다. 특히 업무와 노동 시간이 절대적으로 지켜지지 않은 국내의 상황에 대입해보자면 가정이라 통용되는 공간은 거주적이기보단 쉬어가는 '반항구적' 특성을 지닌다. 그 마지막 가정의 '성역' 마저 무너지고 있음을 우리는 일찍이 해밀턴의 팝아트작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오제가 우려했듯이 해밀턴 역시 관계성, 역사성, 정체성이 파괴되고 일률적으로 동질화되어가는 현대 가정에 경고장을 보낸다.
'달'이란 지표를 통해서 해밀턴은 단순히 그의 담론이 현대소비문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비장소화되는 거주공간의 총체적 위기에 대한 진단을 마련하고자 하는 의중은 아닐까.
서양인들에게 달은 동양적 감수성을 담은 징표가 될 수도 있고 상상력의 원천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균형 감각을 상실한 현대의 매스미디어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은유적 표상으로써 묵직하게 솟구쳐 그 기능을 다한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사회적•역사적 이동성의 거대 서사 속에서 해밀턴은 가장 원초적인 안식처 혹은 그 어떤 희망적인 요소를 작품 내에 장치한 것은 아닐까. '달'은 그 자체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지속적으로 유발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달'은 그 모든 것의 상징적 도식이자 치유와 고찰의 시작점이 될 수 있기에 작가의 의중을 아주 효과적으로 반영한 오브제로도 평가 가능하다.
유일하게 색이 배제된 흑백 콜라주의 두 남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지점이다. 가정 내에서 그 고유의 색감과 빛을 발하는 것들이 사람이 아닌 사물들이라는 것은 마크 오제의 비판과 일맥상통한다.
오늘날의 가정을 이처럼 색다르고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천편일률적으로 동질화되는 비장소적 공간에서 그 구성원들이 세워 나아가야 할 역사 혹은 흔적이란 무엇일까. 또한 그에 선행되는 질문으로서 가정이란 공간은 우리가 머무르는 곳인가 혹은 쉬어가는 곳인가. 팝 아트의 고전답게 리차드 해밀턴의 <오늘날의 가정을 이처럼 색다르고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거리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