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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진문화의 발전과 한계지점

김영태

한국사진문화의 발전과 한계지점

- 한국사진의 주요 흐름을 중심으로-


김영태 사진비평 현대사진포럼대표


한국사진은 현재 그 역사가 120여 년을 지나고 있다. 사진술이 대한제국말기에 도입되었고 초창기에는 서양과 마찬가지로 초상사진부터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예술사진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징후들이 나타난다. 일본인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아마추어 사진가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한 영업사진가들이나 일본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귀국한 전문가  혹은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한 이들에 의해서 예술사진이 발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본사진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그래서  당시에 일본에서 유행한 회화주의적인 살롱사진이나 포토그램, 포토몽타주, 솔라리제이션 등과 같은 실험적인 사진을 추구했다. 실제적인 작품 활동은 신문사나 사진단체에서 주관하는 공모전에 출품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이미 일제강점기에 Y M C에 정규 사진 강좌가 개설되기도 했었다. 이 당시에 강사진들은 영업사진사나 사진단체 지도자, 일본에서 사진을 전공한 이들로 구성되었다. 강의의 주된  내용은 카메라 메커니즘, 사진재료학, 예술사진의 이론 및 실기, 초상사진 등이었다. 

이러한 공식적인 강좌도 이었지만 대부분은 독학을 하거나 지역의 사진단체 지도자들이 도제형식으로 사진기술을 전수하였다. 현재와 같이 이론이 바탕이 된 교육이 아니라 지도자 개인의 경험이 전수된 것이다. 

예술사진의 주된 경향은 1945년 해방이후에도 흔히 칭하는 ‘살롱사진’이였다. 하지만 기와는 다르게 해방 후 혼란스러운 사회현실 속에서 부조리한 현상에 주목을 하고서 기록한 사진가도 있었다. 그가 임석제이다. 그는 미군정하에서 발생한 식량배급과 관련된 부당한 현실을 기록하여 다른 사진가들과 차별화된 사진작업을 했다. 작가는 사회주의 성향의 사진가들이 조직한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산당이 불법화되자 작가는 한동안 사진을 멀리하기도하고 산악 사진으로 관심사를 바꾸었다.


한국사진은 이처럼 해방이후에도 일부 사진가를 제외하고서는 현실과 유리된 탐미주의적인 사진에 천착했다. 그 후 1950년도부터 3년 동안 민족적 비극인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구왕삼, 이명동, 임응식 등과 같은 사진평론가와 사진가에 의해서 리얼리즘사진이 새로운 사진미학 혹은 사진경향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또 1960년대부터는 서울에서는 임응식, 이명동 등에 의해서 새로운 사진운동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형록이 중심이 되어 신선회가 조직되어 리얼리즘사진이 구체적으로 전시를 통해서 가시화되기도 했다. 신선회는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리얼리티와 조형성이 가미된 사진을 추구하는 ‘살롱아루스’라는 단체가 구성되기도 했다. 이 단체는 젊은 세대를 양성하기 위해서 현대사진연구회라는 또 다른 단체를 만들었다. 당시에 이 단체에서 활동한 사진가 중에는 황규태, 박영숙, 고 전몽각 등과 같은 원로 사진가도 있다.

대구에서는 구왕삼에 의해서 리얼리즘사진이 대두되었다. 또 구왕삼은 일간지에 사진평론을 기고하면서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임응식, 이명동 그리고 대구에서는 구왕삼이 주도한 리얼리즘사진은 새로운 사진경향으로 정착한다. 하지만 당시의 사진가들은 구체적인 미학적 이론을 정립하기 보다는 선언적인 의미에 머물렀다. 또 서양의 사진 경향을 정교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서양모더니즘사진 경향인 형식주의 조형사진, 저널리즘사진, 다큐멘터리사진 등을 구체적으로 구분하지 못하고 단순하게 회화주의사진에 반해서 발생한 예술사진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서양의 모더니즘사진을 모두 예술사진으로 수용하는 오류를 범했다. 또 소재는 서양의 저널리즘사진이나 다큐멘터리사진과 유사하였지만 사진가의 의식은 배제되어 정형화된 공모전사진의 일부로 변질되었다. 개별 사진가들의 주관과 창의성은 드러나지 않고 형식화되어 새로운 사진미학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매체예술인 사진의 본질 및 속성을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체계화된 학문적인 태도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이다. 특히 1970년대 초반부터는 10월 유신이라는 이름하에 본격적으로 개발독재가 시작되어 표현의자유가 제약받아 사진가의 사회적인 시각이 드러나는 본격적인 다큐멘터리사진이 정립 될 수 없는 사회적인 현실이 펼쳐졌다.

한국사진은 1970년대를 지나면서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사진인구도 늘어났지만 정형화된 공모전사진이 고착되어 사진문화는 하향 평균화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1964년도에 서라벌 예술대학에 사진학과가 개설되면서 제도권 교육에서 본격적으로 사진전문가를 양성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기도 했다.

또 김한용을 일부 사진가들은 포토저널리스트로 출발하여 광고사진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사진은 1960년대 초반부터 .오랫동안 공모전사진이 주된 사진경향으로 자리매김하여 아마추어사진가들과 그들의 단체가 사진문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홍순태, 육명심, 한정식, 차용부 등과 같은 새로운 세대들이 당시로서는 유일한 신인작가들의 등용무대인 동아사진콘테스트를 통해서 등장하면서 새로운 사진문화의 증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1970년대에는 대구에서도 젊은 사진가인 권부문을 출발점으로 해서 김종수, 차용부, 양성철 등이 당시로서는 새로운 사진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정형화된 공모전사진이나 탐주의적인 사진이 아닌 사진가의 주관적인 시각이 드러나는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진미학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적인 사진 흐름과는 많은 간극이 발생했다. 하지만 1980년대에는 좀 더 발전된 모습으로 사진가 개개인의 개성을 반영하는 전시가 개최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에서 개최된 제3그룹 동인전과 8인의 시각전이다. 그중에서도 8인의 시각전은 서울 뿐 만 아니라 대구, 부산, 강원도 등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진가와 미국에서 사진을 전공한 여성사진가(김민숙)도 참가하여 젊은 세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 전시에 참여한 사진가가 홍순태, 한정식, 이종만, 김복만, 김민숙, 이창남, 양성철, 김영수 등이다. 이들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사진문화를 주도하는 지도자로서 역할을 했다.

이들은 1990년대 초반 ‘한국사진의 수평’展이후 부각된 김승곤, 배병우, 김장섭, 구본창, 김대수 등과 같은 유학출신들과는 다르게 한국적인 토양에서 성장한 자생적인 지도자 그룹이다.


1988년도에 구본창이 주도하여 개최된 ‘사진, 새 시좌’展과  김승곤, 배병우, 김장섭, 구본창, 김대수 등이 주도하여 1991년, 1993년, 1994년 세 차례에 걸쳐서 개최된 ‘한국사진의 수평’展은 한국사진의 현대화, 국제화, 탈 아마추어리즘, 표현의 자율화 등에 큰 기여를 했다. 또 한국미술계가 한국사진을 비롯한 세계사진의 흐름에 관심을 갖게 하는 기본적인 토대가 되기도 했다.

그 후 한국사진은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기존의 예술제도에 편입하면서 새로운 지형을 펼쳐 보이고 있다. 

지난 10 여 년 동안 1960년대 중반이후에 출생한 세대들이 사진문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본격적인 세대는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일정한 영역에서 70대 사진가들이 주도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또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진보적인 성향을 보인 주요 인사들이 현재는 보수화되고 경직되어 사진문화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사진문화를 사진을 표현매체로 출발한 작가들이 주도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보다 한국사진문화가 좀 더 발전하려면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이들이 좀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또 경직되고 보수적인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특히 사진은 현대예술에서 여러 표현매체 중에 하나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지금까지 주요 흐름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한국사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제대로 인식해서 새로운 미래를 펼쳐 나갈 수 있는 이들이 많이 활동하기를 기대하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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