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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몸.살 난 안동의 헛기침 : 2014안동행위미술제를 보고

오광해




오광해 작가 / 인천시 강화군 삼산면 okhaie@hanmail.net

 내가 전위라는 이름으로 만든  단체의 공연을 처음 본 것은 무세중 씨가 이끄는 반 연극 축제(Anti-Theater Fest)의 [’83 청년 전위 예술제]를 통해서였다. 이 연극(?)을 보기 위해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공연 기간 1주일을 통째로 몰입했는데 전위적 예술이나 새로운 예술 사조에 대한 관심보다는 답답한 현실의 출구를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찾으려는 방법의 하나로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익지 않은 철리(哲理)와 그만그만한 용기나 치기로 정치적 현실이나 돌아앉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답을 얻지 못해 정신세계사류의 책이나 종교, 물론 사이비 종교를 포함한 편력과 탐방도 서슴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이때의 '전위'로서의 명칭은 장르적 일탈과 탈 관념의 확장성을 구경하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아방가르드, 개념미술, 퍼포먼스 같은 교과서적 용어가 용해되어 내 현실을 위로해주고 용기와 대안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답답한 학습 부진은 이론과 실제를 다시 배워야 하고, 상상력과 독창성을 없애주는 주입식 제도교육(토론할 줄 모르고 질문할 줄 모르며 통치하기 적당한 국민을 만드는)의 틀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는 모범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1983년 전위극을 만난 계기로 동숭동에서 퍼포먼스를 처음 보게 되었다. 조금 극단적 표현을 하자면 그동안 우리가 꿈 꿔 왔던 희망과 미래의 질서가 위선과 허위의 장막 속에서 독버섯으로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다는 것이 퍼포먼스가 주는 일격이었다. 
 표현의 전위성은 태고의 원초적 몸짓과 동시 공존하며 이것을 일상의 발견처럼 볼 수 있고 초현실을 현실에서 만나듯 시공을 넘나드는 실험적 경험 또한 이 행위예술에서 볼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이다. 
 진짜란 말을 수 없이 반복해야 진짜로 알아먹고 언어는 점차 경음화 되어 가고 ‘너에게 만’이라는 말을 그대로 믿어서도 안 되는 기괴한 세상에서 인플레 된 외로움이나 눈물도 싸구려 소품이 되고 종교와도 같던 순수나 사랑이라는 말은 때가 묻고 닳아서 더 이상 쓸 수 없는 판에 퍼포먼스 행위는 진실에 앞선 리얼, 기정사실, 날 것 그대로를 보여준다. 
 그러나 필연을 위한 진실에 답을 구하거나 제시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희망과 종말을 제시하는 종교성과의 차별이며 인간을 향한 미래며 희망을 위해서가 아닐까. 하지만 그 어떤 단편적 결론도 퍼포먼스의 올바른 정의는 아니다. 살아있는 진행형은 정의나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퍼포먼스는 전위적 긴장과 적확한 이해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작년까지 홍대 부근에서 KOPAS가 개최한 한국실험예술제는 설렘으로 일 년을 기다리게 하는 행사 중의 하나다. 장장 1주일 여 동안 국내의 중견 작가는 물론 세계의 퍼포머들이 세상에서 단 한 번의 행위로 진실을 토해 내는 열기와 그 작가들과의 만남은 통쾌하게 권태를 날려주는 종합선물 같은 '꺼리'를 선사한다.
 권태와 속병을 해소할 놀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작도 끝도 이유도 없는 “이 뭣고?”와 여러 화두를 들 수도 있고, 오늘 죽을 일을 내일로 미루고 죽고 싶지 않을 만큼의 호기심만 생겨도 이 짧은 시간은 찰나와 억겁을 경험할 수 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술로 묻고 술로 답하는 인류들에게 이 시간만큼의 술을 덜 수 있다. 하긴 끝나면 술 생각이 왈칵 나기는 하지만.
 이 정도 구경거리라면 비용을 걱정하고 각오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공짜다. 아주 가끔 자발적 모금도 있기는 하지만 탁발하는 자와 주는 자의 갈등이 없듯 이 모금함은 교회에서 돌리는 성금 바구니 보다 얌전하고 고맙다. 그러니 오래도록 종교를 갖지 못한 내가 퍼포먼스에 은혜를 받아 주변 지인들을 향한 전도를 일삼을 수밖에 없고 한 번 다녀간 사람은 다음 기회엔 자녀와 함께 올 것을 맹세하는 이들을 보는 것도 보람이다.
 
 퍼포먼스는 서울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십여 년 산 전주에서도 매년 행사가 열려 친숙해진 작가들과 작품을 만나면서 타향살이와 텃세를 극복하는데 적절히 일조를 해 주었다.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중앙 집중화 돼 있는 현실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방색과 다양한 문화 고취를 위해서도 의미 있는 행사임에 틀림없다. 이런 행사에 내가 제일 혜택을 많이 본 것 같아 전주 퍼포먼스를 이끄는 심홍재 퍼포머에게 부채 의식이 있는데 끝나면 술까지 사준다. 이번 안동 행사를 견인한 이혁발 작가도 여기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안동 행위예술제의 퍼포먼스는 특별해 보인다. 각 지방에는 고유의 지방 문화와 색이 있지만 안동 하면 떠오르는 ‘전통과 양반’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된 중소 도시에서 어감조차 요상한 퍼포먼스에 ‘몸’이니 ‘살’이니 하는 이물질을 어떻게 소화할지 자못 긴장감마저 드는 것이다.
 게다가 퍼포먼스를 안동에 첫 소개하는 이혁발 작가는 소수의 마니아층 외에는 공개적 지지(?)를 못 받는 감추어진 몸과 욕망을 드러내고 선전하는 에로틱 연구 선동가이기 때문이다. 이혁발, 전위적인 그의 이름을 의심했지만 본명이 틀림없는 타고난  이 시대의 가장 적나라한 전위 작가, 그가 사는 곳이 안동인 것이다.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 삶과 작품이 일치하는 작가라고 말하면 어떤 상상을 할 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꿈이 당면한 문제를 꿈으로 꾸어 넘기거나 초현실로 피신하지 않으며 회피하거나 우회하지 않을 뿐더러 그 화두를 소품으로 만들어 안방에 두고 늘 함께 산다. 그는 몽상가가 아니다. 전위성과 병존하는 의외의 전통성과 고지식한 보수성은 불가사의해 보이지만 열린 개방성으로 토피아적 이상 세계를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지상에서 이루기 위해 이것은 실존보다 더 실재하는 현실을 만들 수 있는 적임자의 조건이다. 여기에 자료가 일천한 한국 퍼포먼스와 작가를 총망라하고 정리한 책을 쓴 치밀한 이론도 결코 장식이 아닌 그가 꿈꾸는 세상 ‘육감도’의 밑그림이며 초석이다.
 
 그동안 내가 감동과 은혜를 받은 작품과 퍼포머들은 매우 많다. 안동 행사의 작가 중에서만도 십여 년도 더 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뵌 영화십계명(선생님의 사인이 든 선언문을 모세의 십계명처럼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을 선언하셨던 성능경 선생님은 지금도 허약한 젊음을 향해 “크레이지”를 휘두르는 가장 전위적 청년이시다. 잠언이나 경전을 인용하지 않으며 반드시 그 행사에 맞는 법어를 완성해 오시며 입으로 충고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현재 몸을 먼저 실험 도구로 내 놓는다. 그리고 국내 퍼포먼스의 중추다운 획이 큰 작품들과 핵심이 간결하지만 때론 장엄한 버라이어티도 놓치지 않는 한국실험예술제를 이끈 KOPAS의 김백기 대표. 어떤 상황의 부조리나 절망도 그가 천연덕스럽게 결속하거나 해부하면 '낭만적 허무' 같은 유행에 질긴 춤을 추며 건널 수 있는 사람, 주제의 변주나 요약이 탄탄한 광주의 김광철 작가 등등. 
 다만 이혁발 작가의 소견을 적어 본 것은 그 자신의 오랜 실천과 삶을 보았고, 이번 안동에서의 행위미술제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성과 부분은 모든 열린 생각의 단초가 될 수 있는 다양성이란 측면에 충분한 의미를 두고 싶다. 그는 척박한 안동 땅에 기꺼이 한 알의 씨를 떨어뜨릴 것이다.

 각종 매체의 공연이나 무대가 식상할 때, 심지어 좋아하는 것이나 생각으로부터 지쳤을 때, 오직 ‘여기, 지금’에 존재하는, 그러므로 퍼포먼스로 불릴 뿐 퍼포먼스가 아닐지도 모르는 어디에도 간주되지 않고 정리되지 않는 '이것'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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