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민영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그래픽디자이너 하라 켄야(原硏哉)는 미술관 전람회 포스터를 의뢰받을 때 종종 이런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관람객을 쓸어 모으는 포스터, 너나없이 몰래 떼어 가는 포스터를 만들어 주세요.” 이 이야기에 나는 얼마 전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에서 내 발길을 오래 붙잡았던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의 포스터를 생각했다.
독일 가내 노동전 포스터-1906년 독일 산업 전시회, 1905-06, 석판, 69.2x48.5cm, 일본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 소장
여성 노동자가 주인공인 이 두 개의 포스터는 각각 1906년과 1925년의 ‘독일 가내 노동전’을 위해 제작되었다. 노동자들의 모습을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그들의 진실을 담는 것이라 여겼던 콜비츠는 노동자, 아내, 어머니로서 대도시의 고단한 삶을 묵묵히 견디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경험과 감정을 노동의 시간 밖, 휴식의 순간에서 포착한다. 고요한 입술 뒤로 낮은 한숨을 조용히 삼키며 생활 너머 어딘가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모습, 지친 이마를 오른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통해 노동자를 인간 이하의 모습으로 비하하는 정치적 묘사를 거부하고 이들 역시 고통을 느끼는 존엄한 인간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가내노동 (1925년 독일 가내 노동 포스터), 1925, 석판, 34.3x42.7cm, 일본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 소장
이 민낯의 포스터에 사람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비웃으며 찢어버렸을까? 그곳에서 자신 또는 이웃을 발견하고 진지하게 전시장 안에 발을 들여놓았을까. 무딘 손톱으로 몰래 포스터를 떼어내어 품에 안기도 했을까.
‘고요한 입술을 허하라.’ 우리 밝고 명랑한 시대에 이 온건하고 우아한 선동은 여전히 강한 울림으로 마음을 끌어당긴다. 피폐한 환경에도 굴복하지 않는 굳건한 여성 노동자들과 생을 마칠 때까지 힘없고 연약한 것들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던 콜비츠의 어울림 속에서 인간의 강인한 아름다움이 하염없이 따스하게 배어나오는 이 기적을 나는 훔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