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대한 나의 최초의 관심과 동경은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 미국 유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스쿨 지망생이었던 내가 학부 전공으로 삼은 것은 정치학이었다. 사춘기 소녀의 미숙한 허영심이라고나 할까? 사회에 제대로 참여하고 기여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행로라고 여겼기 때문인것 같다. 영어도 서투른데다 외국인 여학생으로서 느끼는 감정적 소외감등이 더해져 더욱이 딱딱하고 차가운 학과 공부에 흥미를 갖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성적은 좋지 못했다. 그나마 유일한 성과라고 한다면 교양과목으로 수강한 미술사와 드로잉 실기에서 A+ 를 얻으며 나의 관심 분야를 발견한 기쁨이었다. 대학원 전공을 미술사와 갤러리학으로 미리 내정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IMF 경제난이라는 국가적 문제와 사고로 부모님을 잃는 불운이 겹쳐 유학생활을 지속할수 없었고 한층 부푼 꿈을 접어야 했던 나는 순식간에 젊음의 한창때에 삶의 울적한 시기와 풍파의 터널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미술은 내 삶과 거리가 매우 먼 사치품이 되었다. 나는 생계 를 위해 전혀 적성에 맞지 않는 영어강사 일을 하면서 모든 위로와 희망을 종교와 하느님께 걸고 있었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잃어버린 꿈에 대한 미련과 무서운 현실적 의무, 내가 속한 작은 '점'과 같은 조직의 여러 인간들에 심각한 염증을 느끼며 지쳐갔고 최근에 나를 스스로 보호하고 상처를 치유하고자 그 일상의 수레바퀴를 멈추었다. 그리고 20여년간 내 정신의 다락방에 처박아두었던 미술이라는 옥단지를 잠시 꺼내어 해묵은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내며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비용과 시간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쇠약해진 체력문제로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서 달려가면 곧 마추칠것만 같은 뉴욕과 유럽의 유수한 미술관은 고사하고 국내의 미술관 둘러보기도 여의치 않아 몹시 서글펐다.
할수없이 난 책을 통해서라도 갤러리와 작품투어를 하며 아티스트들의 노고와 그들의 메시지와 스토리를 민망한 죄책감을 안고서 흡수하고 싶었다. 숨은 욕심이 있다면 나의 처지와 심경을 어루만지거나 살짝 건들어주는 작품을 만나는 것이었다. 이제껏 내가 미처 간과했던 삶의 신비와 매력에 주의를 환기시킬수 있는 그런 색깔, 형태, 구성, 아티스트이자 결국 동료인간의 새로운 시각을 접하며 정화받고 싶었 때문이었다. 미술사와 미술가들의 생애와 작품, 미술관의 역사, 관련 주제를 다룬 인문 서적등을 나름 공부하던중 일반적인 범주의 미술 관심자인 내게 다소 귀에 익숙치 않은 이름의 한 아티스트에 주목하게 되었다.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erg). 스웨덴 태생의 공공설치 및 조각미술가. 그의 활동 시기와 무대가 주로 1960년대 미국을 휩쓴 팝아트라는 미술사조에 귀속되기 때문에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턴슈타인과 언제나 같은 선상에 분류되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팝아트 자체나 미술사를 굳이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도 유명한 그들의 작품에 그다지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나의 현실,내가 느끼는 삶의 딜레마와 같은 문제와 연관성이 별로 없거나 적어도 내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예술작품에 너무 큰 기대, 거의 종교적인 희망을 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나의 바램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희망의 실마리가 '삐죽' 내게로 머리를 내밀었다. 바로 올덴버그의 몇몇 작품을 명확하고 깔끔하게 흐르는 작품마인드이다. 전혀 현학적이지 않다. 애매모호한 상징이나 장치를 배치하여 위로나 해답이 긴급히 필요한 욕심꾸러기 관람자인 나를 난감하게 만들지 않는 충직하고 건강한 그의 작품 이미지는 그렇게 내게 가치있게 보였다. 올덴버그는 이렇게 애기하였다.'나의 작품은 반어적으로 사물의 힘을 되돌려준다.' 그의 말이 맞다. 사물의 질감이 전혀 다른 매체를 이용하여 제작한 실내 설치작품 <부드러운 선풍기> <부드러운 변기> <부드러운 타자기>등은 해당 사물의 질감 자체를 정 반대로 변질시켰고 , 일상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물을 극대화하여 실외에 특히 공공 장소에 설치한 모종삽이나 새의 깃털등의 작품은 크기와 질감을 바꾸었다. 그리고 나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물의 힘을 되돌려 준다고 주장한다.
변질 변형된 사물을 보며 본래의 사물을 떠올리기 때문일까? 언뜻 획기적이지 않은 주제일수도 있지만, 일상과 주변의 모든 것에 공허와 염증을 느끼던 내가 찾아야만 했던 해답의 힌트를 신선한 방식으로 건네주었다. 이후로 나는 내 주변을 의도적으로 '낯설게' 바라보려고 시도하였다. 사람들, 소유물들,거리에서 마주치는 고리타분한 광경, 나의 작은 아파트 공간 여기저기 배치되어 집주인의 눈길과 손길에 스쳐가는 물건들, 때로는 일절 관심도 받지 못하고 방치된 사물을 다시금 천천히 돌아보면서 그들의 '힘'과 '값어치'를 되돌려 받으려 기다렸다. 커피포트, 볼펜, 선물들, 낡은 책들, 냉장고, 의자, 헤어 드라이어 등등. 그들은 갑자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주인님! 혼자가 아니예요. 저희들이 주인님과 함께 살아왔고 언제나 이 자리에서 함께 버텨왔어요.' 물 한잔,커피 한잔, 빵 한 조각, 책 한 권, 그림 한 점이 내 눈 앞에 나타나기까지 무수히 세밀한 과정속에 거쳐간 인간과 기계의 수고, 그것을 뒷받침하고 재료와 영감을 준 자연과 자연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상기시키며 그들은 실제로 내게 '사물의 힘을 되돌려'주었다.
이 기쁘고 독특한 미술쾌락은 이제 비로소 시작되었다.삶과 미술에 대한 애정과 포기하지 않는 열정의 등불이 계속 희미하게나마 타오르는 한,다양한 미적 쾌락은 선물 혹은 보상의 형태로 나에게 보답할 것이라 믿는다. 매일 당연하다는 듯이 매너리즘과 권태의 눈으로 일상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숨어있는 힘을 되새기고 겸손하게 감사를 느끼려 노력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