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기간 : 2017년 2월 3일(금) - 24일(금)
전시장소 : 사진‧미술 대안공간 SPACE22
다큐멘터리스타일의 예술사진
글: 김영태 / 사진문화비평, 현대사진포럼대표
다큐멘터리사진은 1929년에 미국에서 발생한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피폐해진 미국의 농촌현실을 기록함으로써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한 의도에 의해서 미국농업안정국이 기획한 F S A 다큐멘터리사진프로젝트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1950년대까지는 다큐멘터리사진이 ‘사진의 대명사’라고 이야기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등 세계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이 많이 발생하였고 격동기였다. 다큐멘터리사진의 비중이 커진 것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다큐멘터리사진은 1950년대 후반이후 지극히 사유화私有化되었고 표현대상도 변모했다. 공적인 사건이나 특별한 인물을 소재로 삼은 것에서 탈피하여 사진가들의 표현대상이 일상으로 옮겨졌고, 사진가들의 태도도 주관적으로 변화되었다. 영상언어의 사유화가 발생한 것이다. 그 후 1980년대부터는 다큐멘터리사진과 예술사진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구분을 짓는 것이 무의미한 경우도 많다. 사진가 안성용의 작업도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다. 작가는 포항 송도해수욕장을 오랫동안 기록했다. 산업화로 인하여 변모한 송도의 여러 현실,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주민들의 삶, 여가를 즐기려고 송도를 찾은 사람들의 모습 등에 주목했다. 작가는 자유로운 앵글 및 프레임을 선택해서 셔터를 눌렀다. 그가 주목한 현실은 특별한 장면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일상이다. 그런데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밝기보다는 침울하다. 작가는 산업화로 인하여 변모한 송도의 다양한 모습을 포착해서 시각화했는데 긍정적으로 송도의 변화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비평적이다. 송도를 찾은 관광객은 그곳이 여가를 즐기기 위한 특별한 장소이지만 송도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일상이자 삶의 터전 즉 현실에서 생존을 하려는 치열한공간이다. 작가가 포착한 여러 장면들은 그러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작가는 자신의 메시지를 명료하게 들려주기 위해서 날씨가 흐린 날 주로 촬영했다. 그래서 작품 한 장 한 장의 분위기가 밝은 분위기가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침울하다. 마치 송도가 산업화로 인하여 변모하는 것에 대한 작가의 안타까운 심정 혹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개념적인 사진 찍기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마주한 송도의 여러 풍경 및 주민들의 삶 그리고 휴가객의 모습을 직관적으로 카메라 앵글에 담았다. 그래서 작품마다 작가의 감정이 투사되어 드러난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다양한 현실을 기록했다. 예술사진의 표현스타일과 차별점이 없는 태도로 사진작업을 했다. 최근 20여 년 동안 동시대사진은 빠르게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하였는데 안성용의 작업도 그러한 동시대사진의 경향을 반영한다. 다만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사진가들처럼 흑백사진을 고집하는 것이 동시대다큐멘터리사진과 차별화된 지점이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1960년대나 70년대에 촬영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사진은 1950년대부터 유미주의적인 살롱사진에서 탈피하며 소위 ‘생활주의사진’으로 빠르게 경도되었다. 그 후 1960년대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현재의 70대 이상 사진가들은 서양의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나 포토저널리스트들의 사진에 영향을 받아서 선배사진가들과는 다른 사진작업을 보여준다. 정형화된 공모전 사진이나 일제 강점기 때에 시작된 살롱사진과 차별화된 요소가 발생했다. 한국사진에서는 다큐멘터리사진이라는 용어가 19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진가 안성용도 이러한 한국사진의 전통을 계승하여 자신의 사진세계를 구축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로버트 프랭크나 리 프리들랜더와 같은 사진가의 사진에 영향을 받은 세대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업은 이러한 사진적인 뿌리에서 출발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1990년대 대구경북사진의 전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작가의 작업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송도의 일상에 주목한 결과물이다. 자신의 삶의 터전의 일부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송도가 변모하는 모습을 지극히 주관적인 태도로 재현한 조형언어다. 그러므로 관객들은 사진가 안성용의 내밀한 사유세계 및 세계관과 마주한 경험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지점에서 사진가 안성용의 작업이 미학적인 당위성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것이 우리가 이 사진가를 주목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