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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농 허건 화백 20주기 추모전

노상학

『남농(南農) 허 건 화백 20주기 추모전시』를 보고


지난 5월 중순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주말 오후, 서울 도심의 덕수궁 미술관을 찾았다. 호남화단의 거두로서 小痴 허련의 손자이며 米山 허형의 4남으로 태어난 南農 허건의 20주기 기념전(07.5.4-6.10)을 보기 위함이었다.
전시장까지 가는 길목의 덕수궁 경내는 비안개에 젖어 한결 호젓해 보였고 주변의 松林은 이슬을 머금은 채 생기가 넘쳐 흘렀다. 비가 오는 오후라 전시장은 한산했고 나 홀로 감상하고 상념에 잠기기엔 안성마춤이었다.
남농 허 건..... 과연 그는 누구인가?
미술애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호남화단의 한국화 大家이다. 그는 또한 作故 직전 몇 년 사이에 그린 작품이 온정에 싸여 다작을 했기 때문에 명성에 비해 가격이 낮은 작가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일반인에게 회자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전통의 고답적인 표현양식과 주제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발상을 통해 實景의 현실감과 아름다움을 화선지에 토해낸 이 시대의 진정한 大家라고 할수 있다.
이번 전시는 제1부 전통의 계승과 혁신(1930~45년), 제2부 新南畵의 정립(45~60년대), 제3부 이상향의 추구(70~80년대), 4부는 시화 및 사군자를 통한 ‘문인화의 정취’순으로 소개되었다. 이미 과거에도 크고 작은 전시회를 통해 남농의 작품세계가 수차례 소개되었지만 이번 전시의 특징은 靑年 남농이 전통과 혁신사이의 작품세계에서 어떻게 고민하고 극복하였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진 특정분야의 전시라고 기획자는 밝히고 있다.


제1부에 소개된 작품들은 조부 소치와 부친 미산의 고전적 남종화풍을 이어 받으면서도 자유로운 자연관을 나타내기위하여 실경사생을 바탕으로 한 산수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 무렵에 그린「낙화암도(38년작)」나「新春(39년작)」이 그 당시 남농이 추구한 채색이 가미된 실경산수의 전형이었다. 일본풍의 채색은 일제 강점기때 조선미전에 입선하기 위해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작가는 생전에 술회한 바 있다. 이 당시 남농의 작품세계가 비교적 다양하고 실험정신이 강한 면모를 보여준 사례의 하나가 몇점 남긴 드로잉(素描)에서도 엿볼 수가 있었다. 그가 모든 것이 통제된 사회에서도 화풍의 시각이 자유로웠던 원인이 일본으로 유학한 막내동생 허림(林人)을 만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후 거기에 머물면서 그 당시 회화조류를 처음으로 접하고 난 이후가 아닌가 싶다.

제2부는 해방이후 청년 남농이 일제시대의 채색화풍을 과감히 배격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세계를 구축한 시기다. 전시된 작품중「금강산 所見(46년작)」이나「목포 多島 一隅(52년작)」,「農家何日(55년작),「秋江無盡圖(60년작)」, 江山無盡圖(60년초)」등이 신 남화풍의 기법으로 그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은 채색을 극도로 절제하고 먹의 濃淡을 이용하여 遠景과 近景, 陰과 陽의 조화를 사실감 있게 묘사하였다. 또한 중국의 高士가 읊어 유래한「樂地論 (60년)」의 본래 의미를 그림으로 옮긴 8폭 일지병풍도 눈길을 끌었다. 그림 상단에 그는 다음과 같이 유려한 필치로 話題를 적었다.
「주변의 산수를 즐기고 道를 논하며 책을 강론하고 古今의 역사와 인물을 평한다. 세상을 유유히 살며 천지만상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어찌 제왕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부러워하랴!」 그는 그 당시 전국을 여행하며 갈필법, 점묘법등을 이용하여 우리나라의 실경산수를 담아내는 데 열정을 다 바쳤다.

제3부에 해당하는 70~80년대는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화풍도 굵고 대담한 필선으로 바뀌었다. 즉, 자신감 넘치는 속필을 바탕으로 南道의 아름다운 풍경을 원숙하게 담아내기도 하고 풍상고절의 소나무도 이 무렵
부터 그려내기 시작한다. 농묵과 담묵의 적절한 조화와 경쾌한 필법으로 그린「외솔」,「雙松」,「三松圖」의 대작을 보면서 畵伯의 고고함과 높은 정신적 기개를 엿보는 듯 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었다.

마지막으로 4부는 남농이 평생 보여주었던 藝人과 文人으로서의 기질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문인화에 대한 그의 애착을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한글서예에 익숙하지도 않으면서 직접 한글로 다음과 같이 시를 써서 남긴 소품의「석류도」가 나의 시선을 머물게 했다.
「알알이 영근 정을 석류는 간직하다 몾해 그만 가슴이 빠개지는 아침이여!」
大家에 어울리지 않게(?) 삐뚤삐뚤하게 쓴 글씨에 웬지 모를 친근감을 느껴 한참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또한 미당 서정주, 아동문학가 이원수, 시인 명기환등과 친교를 하며 그린 合作圖도 정겹게 만날 수가 있어 나의 입가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전시실의 작품감상을 마치고 로비로 나오자 묘사와 채색이 덜된 작품 한점이 눈에 들어왔다. 남농 화백이 1987년 10월에 산수화를 마지막으로 그리다 멈춘 遺作이었다. 마지막 생을 마칠 때 까지 혼신의 힘을 다한 노화가의 흔적을 보고 마음이 숙연해졌다.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또 돌아서 보고.....가벼운 피로 속에 무려 세 시간을 보내고서야 내 마음은 흡족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밖은 이미 어스름 해졌고 궁 밖의 네온 불빛만 저 멀리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휙 지나가자 남농이 그림 話題로 쓴「畵論」일부가 뇌리를 스쳤다. 「그림의 法만 있고 그림의 이치(理)가 없으면 안되고, 그림의 이치만 있고 그림의 의취(意趣)가 없어도 안된다」남농의 작품세계에 대한 머릿속 정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20년 전 작고한 인자한 모습의 남농 화백이 문득 그리워졌다.(2007.6.10)

▶ 투고자 : 서울시 중랑구 신내1동 479 중앙하이츠 아파트 4동907호
회사원(미술애호가) 노 상학(☎ 6216-2170, 010-6440-5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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