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림 무나카타 시코 전에 다녀와서...
김혜자
또 한 명의 우리나라 화가를 알게되어 행복했다.
월초가 되면 나의 마음은 늘 부산하다. 이번 달에는 어떤 전시를 갈까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메스컴이나 신문을 통한 전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 찾기 시작했고.그래서 늘 새로운 달의 시작은 나만의 미술관 계획으로 마음이 바쁜것이다. 미술정보지를 찾아 보고, 즐겨 가는 미술관 홈페이지를 방문하면서 달력에 메모를 해 두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이달의 시작은 덕수궁미술관으로 정했다. 홈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던 강렬한 듯 하면서도 낯익은 그림 한 점 때문이었다.
덕수궁미술관에선 최영림&무나카타시코전이 열리고 있었다. 물론 두명으 화가 모두 나는 모르는 화가들이었다. 오히려 그림을 보러 가면서 혼자 또 한명의 여류 화가를 알게 되는 마음에 들뜨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최영림이란 화가는 남성화가였다. 이름이 그러하고, 그림들이 또한 여성적이어서 나는 당연히 여자일거라는 나만의 생각의 오류를 범했다. 늘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이렇게 큰 실수를 한다. 남성인 화가를 여성인 화가로 알고 있었다는 것 보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 나의 안일한 생각과 좁은 편견이 부끄러웠다. 그런 부끄러운 마음으로 선생의 그림을 마주했다. 내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그림을 먼저 본다. 여인이란 작품이었는데. 선생은 전후 단신의 몸으로 월남한 화가였다. 때문에 북에 두고온 가족의 생각으로 마음이 편할 수 없었고,그러한 마음은 그림으로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었다. 그림이 시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런 감정 때문일 것이다. 단 하나의 그림에서 슬픔과, 북에 두고 온 가족의 걱정과 선생의 고단함 그리고 고독 외로움이 모두 느껴진다. 그와 함께 이 그림이 줄 수 있었던 맛은 바로 그림을 통해 우리나라의 화가와 서양화가들과의 관계를 볼 수 있었던 부분이 아닐까 한다. 선생님은 피카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여인이란 그림이 낯익었던 이유는 바로 피카소의 기형적인 모습과 닮아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여인이란 그림을 보면서 우리시대의 아픔과, 피카소의 영향을 받았던 화가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림을 즐겁게 볼 수 있게 해 주는 건 아닐까 라고 생각 해 본다.
여인이란 그림과 함께 하나 더 내 시선을 한참 잡아 맨 그림이 있었는데 바로 꽃바람이란 그림이다. 남한에서 다시 결혼을 하고 생활이 안정기로 접어 들게 되면서 그린 그림에는 행복함이 또 그대로 묻어나있다. 건강하고, 행복하고 정말 저 여인처럼 하늘로 꽃향기 나는 바람에 취해 날아 가보고 싶다 라고 생각을 했으니까...
최영림과는 사제지간이었다는 무나카타 시코의 그림들은 조금 낯설었다. 불교에 심취한 화가였음에도, 일본식불교와 우리나라식 불교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내 마음에 들어 온 그림은 화수송이란 판화였다. 일본 아이누족을 묘사한 그림이지만 모태는 우리나라의 고분벽화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이 그림이 아름다웠던 건 전쟁터로 향하는 무사들의 팔에 활이 아닌 꽃이..그래서 바탕엔 화살이 날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꽃들이 마치 웰컴투동막골이란 영화에서 폭탄이 파콘이 되는 것처럼 꽃들이 날라 다니고 있었다. 행복을 서로 나누어 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하면서 기분 좋게 바라 본 그림이였다. 최영림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스승 무나카타, 그가 더 존경스러웠던 건 가난을 극복하고,고흐처럼 멋진 화가가 되기 위해 독학으로 공부를 했다는 것, 그리고 최영림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될 수 있겠다.
지난주 전시를 다녀와서 내내 최영림이란 화가의 느낌을 어떻게 마음속으로 담아 두어야 할지 고민을 했었다. 오늘 박제동화백의 인생만화란 책을 읽으면서 화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대상과 친해지는 느낌을 받는 다고 했다. 나 역시 그림을 보러 가는 이유는 내면 속의 감정을 오롯이 만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이 번 전시에서 꽃바람과 여인이란 그림은 나에게 수없이 많은 말들을 걸어 오고 있었고 나는 혼자만의 감정 속으로 실컷 놀다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