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젓한 초목길을 따라 미술관에 도착하니 사람들로 북적인다. 모두 정선의 그림을 보기 위해 수고로운 발길을 아끼지 않은 모양이다. 안은 한층 더 복잡하여 제대로 감상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으나, 땀나음 속에서도 이내 겸재의 화폭에 빠져들 수 있었다. 먼저 맞이해준 그림은 활달한 필치의 산수화였다. 느릿하게 길목에서 천천히 그림을 감상하니 먹향이 진득하게 베어 나오는 듯 했다. 걸음을 옮기면서 넓은 화폭이 연달아 늘여져 있는 곳으로 당도했는데 비로소 진국을 감상해 볼 수 있는 듯 했다.
가운데로는 조그마한 크기의 소품들이 유리관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아담한 구성이 돋보이는 여산초당(廬山草堂), 인왕산 골짜기의 한 자락을 그린 청풍계(淸風溪)는 원래 의도한 것인지, 뿌연 안개가 끼여 있어 색다른 효과를 나타냈다. 풍악내산총람도(衝岳內山摠藍圖)는 <금강전도>로 착각할 뻔했다. 기법이나 표현, 담겨진 사상이 금강전도의 그것과 꼭 닮았기 때문이다. 설평기려(雪坪騎驢)와 겸재의 영향이 확연해 보이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도 있었다. 압구정, 아차산등 낯익은 이름의 생소한 풍경들도 즐겁게 살폈다. 한강을 따라 그렸다던 독백탄(獨栢灘),우천(牛川)등이 보였다.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가운데 하나인 우천(牛川)은 맑은 푸른색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빼어난 조형성을 이루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통천문암(通川門岩)인데 다른 작품에 비해 어쩐지 황량한 기운이 감돌았고, 여백의 공허함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감흥이 그랬기 때문이지 몰라도 붓자욱마저 쓸쓸해 보였다. 먹으로만 그려진 이 그림은 우선 거대한 자연과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대비가 드러난다. 인물들은 조심스럽게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데 무엇때문인지 당나귀도 사람도 주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암벽은 한껏 웅장하게 제 모양새를 취하지는 않고 가느다란 필선의 파도만이 화폭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묘사된 동해는 자연을 의미하기보다는 초월적 존재의 드러남을 보여주는 듯 했다.
작년의 간송미술관을 갈 기회를 놓쳐서 아쉬웠는데 이번 기회에 목마름을 축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좀 더 많은 이들이 감상해 볼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양연희, 경원대학교 회화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