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유연 개인전, 꽃+인큐베이터, 2010. 1. 31.
내가 참가했던 대안 공간 도어의 개미시장 전시의 작품 철수를 위해 나는 일요일 저녁 서둘러 홍대 앞으로 향했다. 하지만 너무 서두른 탓일까, 조금 일찍 홍대 근처에 도착한 나는 정해진 시간에 작품을 반출하라는 도어 관계자의 말에 따라 정해진 시간까지 홍대 근처를 할 일 없는 놈팽이처럼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발견 한 곳이 꽃+인큐베이터라는 작은 전시공간이었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인도 지하에 자리 잡은 공간은 들어가는 입구가 매우 협소해 보였다. 나는 신기한 발견이라도 한 듯. 마치 어릴 적 남자아이들이 여자 목욕탕을 훔쳐보는 관음증적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허리를 숙여 유리문 바깥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불이 켜져 있다는 것은 전시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이곳에 어떤 작품이든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나는 대여섯개의 작은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흉’이라는 전시 주제를 가지고 작업한 작가의 평면작품들이 갤러리의 차가운 벽면을 덮고 있었다. 갤러리는 밖에서 스쳐지나가듯 보는 것과는 달리 그 내부는 생각보다 굉장히 크고 넓었다. 무엇보다 알맞은 높이의 천장이 맘에 들었다.
나는 작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내 나의 발자국 소리때문인지 어떤 여자분이 나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왔다. 나는 그림의 작가분이냐고 물었고,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전시를 시작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작가의 싱싱함과 긴장감이 묻어나는 아주 창백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그에 반해 유난히 동그란 검은 눈동자가 굉장히 튀어 보이는 작가는 왜소하고 수줍은 미소를 띠며 뒷걸음질쳤다. 그녀의 작품은 ‘흉’ 즉, 흉터라는 주제에 걸맞게 자아 혹은 주변의 상처와 아픔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러한 에너지들이 음산함을 발산하기까지 했다.
작가는 무엇에 의한 아픔을 간직하고 그것을 표현하려 했을까. 장지 위에 채색되어진 그녀의 작품들은 모두 조금은 괴기스럽고, 스릴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작품을 본 순간 나는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와 다시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혹은 그와 비슷한 언저리의 데 키리코의 작품에서 보여 지는 ‘여백의 공포’마저 순간의 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듯 한 느낌도 든다. 안면부가 가면처럼 잘린 누군가의 얼굴, 깊은 수영장 물에 엎드린 채 수면 위로 떠오른 여자, 어두운 계단을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 캔버스 안을 부유하는 두상들, 붕괴된 건물과 난민이 되어버린 소년의 운명 등 그녀의 작품 속 상상력은 모두 치유되지 못한 영혼과 육체의 뒤엉킴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는 그림 속 주제들의 흉함, 허물의 굴레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그녀의 손을 통하여 캔버스에 가지런히 놓여진다. 나는 그녀에게 있어 상처라는 단어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매우 인간적인 자기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이 작고 가냘픈 젊은 여류작가는 성장을 계속 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디 가슴으로 우는 작가이길 희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