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번가 작업실의 <에탕 도네>, 1968, 데니즈 브라운 헤어, 젤라틴 실버 프린트,
Philadelphia Museum of Art, Library and Archives: Étant donnés Records
ⓒ Association Marcel Duchamp / ADAGP, Paris - SACK, Seoul, 2018
시뮬레이션 이론은 이 우주가 초지성에 의해 만들어진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며, 인간은 프로그램 코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가설이다. 예시적으로 영화 <매트릭스>에서 보여주고 있는 세계관으로 우리가 믿고 있는 세상이 사실은 정교하게 조작된 가상현실일 뿐이라는 의구심을 나름대로 정교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흡사한 아이디어를 과학자들의 이론보다도 더 먼저 작품으로서 탄생시킨 것은 마르셀 뒤샹일지도 모르겠다. 뒤샹의 작품세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관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술작품을 결과물(사물)로서가 아니라 관람객의 시선에 의해 던져지는 인식의 과정(질문)으로 재정의한 것이다. 이와 함께 자신의 작품을 매개로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게 발생된 시선들의 사이에서, 마치 이 모든 것을 의도한 것처럼 지켜보는 뒤샹의 시선으로서만 존재하는 시선이 숨겨져 있다. 즉 시선을 창조하는 시선이야말로 창작의 본질로 발현되는 것이다.
뒤샹의 비밀스러운 마지막 작품인 <에탕 도네>에서는 마치 관념적 시뮬레이션을 연상케 하는 아이디어가 숨겨져 있다. 문틈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에로틱한 장면은 관객의 시선을 유인하는 현실의 풍경을 닮았다. 관객은 그 문틈에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자유의지로 작품을 탐색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은 문 안의 세계는 가상의 풍경이고, 관객의 의도적인 관람행위는 뒤샹의 의도로 조작된 것이다. 이로써 관객의 시선 위엔 창작자의 시선이 존재하고, 마찬가지로 그 위에는 또 다른 세계의 시선이 존재할지도 모르는 암시적인 구조는 어쩌면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허구이고 겹층의 시뮬레이션일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제안한다. 물론 이 작품에 대한 진짜 의도는 뒤샹 자신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이 작품으로부터 매트릭스를 연상하고 있다면, 그는 뒤샹이 원했던 30년 후의 미래의 관객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