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모델 : 제히코부터 마티스까지》
프랑스 파리 오르세미술관
2019.3.26-7.21
다양성에 대한 진보적인 담론이 비로소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인류역사의 현시점에서 파리 오르세미술관이 획기적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전시는 기존의 미술사에서 간과했던, 또는 알고 있었지만 눈길을 주지 않은 이들을 조망해보고자 합니다. 그들은 유럽에 거주하는 백인 중심의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며, 그들의 예술과 예술사에 상당한 기여를 한 흑인 모델입니다. 모델로서 흑인들에게 자유와 평등의 가치에 준하는 올바른 이름과 정체성을 부여하며, 오랜 시간동안 무시되었던 그들의 역사를 전시로서 서술해보려는 현대적 시도인 것입니다. 오르세미술관의 관장은 이에 덧붙여 ‘모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모델을 작품의 대상으로 보는 것에서 나아가 주권과 가치를 품은 직업인으로서 조명해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거의 2세기에 달하는 작품과 자료들을 활용한 전시의 리듬이 아주 촘촘하고 무척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19세기 유럽의 화가들은 모순적이고 불평등한 노예제도를 목격하게 됩니다. 1794년 프랑스 공회의 전면적인 노예해방 선언을 이룩하기까지 끊이지 않았던 잔혹한 투쟁과 그 이후에도 또한번 노예를 승인하고 다시 폐지하는 기나긴 여정을 화가들 또한 바다너머 매체를 통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몇몇 화가들은 프랑스 살롱전에 흑인 노예들의 인권탄압을 규탄하는 작품들을 출품했습니다. 오귀스트 비아르François-Auguste Biard는 그 중 한명으로 <흑인노예무역>을 출품함으로서 프랑스 화단과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노예를 너무 생생하게 표현했다는 이유로 거부당했습니다. 하지만 몇차례의 혁명 이후 세워진 프랑스 2차 공화정에서는 다시 나폴레옹 시절 공화정 체제를 다시 찬미하며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졌고, 비아르에게 노예제도폐지를 묘사하는 작품을 의뢰하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이 때 비아르는 <1848년 4월 27일 프랑스 식민지에서 노예제도폐지 선언>이라는 큰 규모의 그림을 캔버스에 그립니다. 쇠고랑을 끊고 하늘로 몸부림치는 자유로워진 노예들과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위로 손을 뻗치며 노예제도 폐지의 날을 축하하는 흑인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야만적’으로 묘사한 노예들과 그에 반해 점잖고 권위적으로 서있는 프랑스인, 그리고 노예들을 어루만져주고 있는 듯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을 보았을 때 좌측에 자랑스럽게 펄럭이는 국기 아래 프랑스의 식민정책을 오히려 인정하고 있는 한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François-Auguste Biard, Proclamation of the Abolition of Slavery in the French Colonies
27 April 1848 , 1849, Musee d’art Roger-Quillot>
노예제도 반대를 넘어서 유럽중심의 ‘미’에 대한 독점적 기준에 반대하는 예술가도 있었습니다. 샤를 꼬르디에Charles Cordier는 ‘미’는 포괄적인 개념이며 무수하게 다른 방법으로 표현될 수 있어야한다는 소신을 가진 예술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조각한 흉상에는 다양한 얼굴들이 등장합니다. 부드럽고 온화한 여신상이나 높고 오똑한 코와 근육질의 (남)신상의 모습이 아니라 그가 만들고자 한 것은 날카롭게 조각한 흑인들의 흉상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Vénus Africaine 아프리카 비너스> 입니다. 곱슬머리와 입체감 넘치는 두상으로 인해 그녀가 흑인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존에 떠올리는 비너스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만, 고요하고 차분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무심한 눈빛과 온화한 표정, 편안하고 우아한 자세의 그녀는 의심의 여지 없이 비너스입니다. 꼬르디에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만연했던 흑인들을 바라보는 우월한 시선을 여과 없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비너스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와야만 하고 그럴 것이라는 조각가의 소신이 강렬히 느껴졌습니다. 유럽공동체의 오래된 공공의 적 아랍세계의 사람들조차 꼬르디에는 그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아주 화려한 의상과 모자로 꾸며진 술탄의 모습은 유럽의 왕과 비할만합니다.
<Charles Cordier, Vénus Africaine, 1851(좌, 중) Charles Cordier, Homme du Soudan Française, 1857(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