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길거리를 걷다 보면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것이 그래피티다. 그래피티는 벽에 스프레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으로 예술과 낙서 그 경계선에 서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현대 그래피티는 1960년대 말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콘브레드와 쿨 얼이라는 서명을 남긴 인물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뉴욕의 브롱크스 거리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초기에 그래피티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반항적인 청소년들과 흑인, 소수민족들이었는데 그들은 거리의 벽뿐만 아니라 지하철 전동차, 기타 공공시설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래피티를 그려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논란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장 미셸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이 자신의 작업에 그래피티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그래피티는 점차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뱅크시 또한 그래피티를 위주로 작업하는 작가인데, 그의 작품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길거리에서 많이 보는 화려한 그래피티와는 조금 다르다. 뱅크시는 공공장소의 공공시설이나 쓰다 남은 철근, 전봇대 등을 이용한 작업을 많이 선보이며 스텐실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스텐실 기법은 글자나 무늬 모양을 오려내고 뚫린 부분에 물감이나 스프레이 라커를 뿌리는 기법으로 빠른 시간 내에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뱅크시가 스텐실 기법을 쓰는 이유는 그의 유년시절 경험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14살 때 영국 브리스톨에서 집단 그래피티의 멤버로 활동하다 체포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얼굴 없는 화가’로 활동하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거리에서 빨리 작업을 하고 사라지는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기에 작업 속도가 빠른 스텐실 기법을 사용한다.
풍선과 소녀 Girl with a Balloon (Stencil, London’s West Bank, 2002)
사랑은 쓰레기통에 있다 Love is in the trash bin (2020)
뱅크시의 대표작으로는 ‘풍선과 소녀’, ‘꽃을 던지는 사람’ 등이 있는데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사회 풍자적이며 파격적인 성격을 띈다. 특히 ‘풍선과 소녀’ 같은 경우는 2002년 런던 쇼디치 근교에 벽화로 처음 그려진 뒤 지속적인 인기를 얻으며 재생산되었다. 이 그림과 관련해서는 2018년 10월 영국 소더비 경매에 나왔다가 낙찰되는 순간 파쇄기가 작동되며 그림의 반이 파손되는 해프닝이 있었는데, 이것 또한 미술시장에 대한 뱅크시의 사회비판적인 퍼포먼스였다. 후에 뱅크시는 본래 의도는 이 작품 전체를 다 훼손시키는 것이었지만 작동 오류로 반만 잘렸다고 밝혔으며 그의 에이전시에 의해 이 작품은 ‘사랑은 쓰레기통에 있다’라는 제목으로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처음 훼손되지 않은 그림을 구매했던 낙찰자는 반쯤 훼손된 작품도 또 다른 작품의 가치를 가진다며 흔쾌히 구매했다. 이 퍼포먼스가 이뤄진 다음날 뱅크시는 자신의 SNS에 ‘파괴의 욕구는 곧 창조의 욕구’라는 피카소의 말을 인용해 게시물을 업로드했다. 그러나 이 퍼포먼스 이후 뱅크시의 비판적인 의도와는 다르게 뱅크시의 작품이 값이 올라간 것을 보고 똑같이 따라하는 예술가들이 생겨나는 다소 씁쓸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게임 체인저 Game Changer (Southampton General Hospital, 2020)
하지만 뱅크시가 모든 작품을 사회비판적인 의도만 가지고 제작한 것은 아니다. 2020년 코로나가 전세계로 확산되며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이들을 위해 가장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의료 종사자들이다. 뱅크시는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열심히 맞서 싸우고 있는 의료 종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뜻에서 <Game Changer>라는 작품을 공개했다. 이 작품은 영국 사우샘프턴 종합병원의 응급실 근처에 설치되었으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어린아이가 손에 쥐고 있는 장난감으로, 배트맨이나 스파이더맨과 같은 히어로가 아닌 마스크를 쓰고 있는 간호사 인형이다. 전체적인 그림은 모두 흑백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 간호사 인형에만 붉은 색의 적십자 마크가 그려져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뱅크시는 이 그림을 병원 직원에게 보내며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이 그림이 비록 검은색과 흰색일 뿐이지만, 그곳이 더욱 밝아지길 바랍니다.” 뱅크시는 이 그림을 통해 당연시되었던 의료 종사자들의 노력을 감사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사람들이 코로나 예방에 더욱 힘써야 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 그림을 영국 국립보건원의 기금 마련을 위한 경매에 출품하는데 동의함으로써 힘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Girl with pierced Eardrum (Stencil, Bristol, England, 2020)
If you don’t mask – you don’t get (Stencil, London, England, 2020)
뱅크시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막기 위한 가장 좋은 대책인 마스크 쓰기를 권장하는 그림도 남겼다. 기존에 자신이 그렸던 <Girl with a Pierced Eardrum>에 마스크를 그려넣기도 했고, 런던 지하철에 <If you don’t mask – you don’t get>이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작품의 주인공은 뱅크시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쥐로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재채기하는 쥐가 침방울을 튀기는 모습, 그리고 손소독제를 꼭 쥐고 있는 쥐, 마스크를 쓰는 쥐 등이 그려지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스크를 착용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이 작품이 제작되는 과정은 영상으로도 제작되어 뱅크시의 SNS에 올라왔으며 영상 말미에 “난 격리됐지만, 다시 일어날 거야.”라는 문구가 등장하며 코로나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이 작품은 그래피티 금지 정책에 따라 런던교통공사에 의해 지워졌지만 런던교통공사 측에서는 마스크 착용을 권고한 것에 감사하다는 메세지를 전달했다. 물론 그림이 지워진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러나 그래피티의 특성상 지워지는 것이 당연하므로 자신의 작품을 Shit이라고 표현한 뱅크시의 의도를 고려해볼 때 이 또한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여진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반항의 상징인 그래피티로 끌어내고 그와 동시에 사회가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짧고 강렬하게 전달하는 뱅크시. 그는 자신의 예술철학을 한 문장으로 정의했다. “예술은 불편한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고, 편안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회를 비판적으로 꼬집으면서도 지친 사람들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네는 그는 ‘더 좋아 보이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예술 테러리스트’다.
좌은서 eunjwa112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