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한 해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아마 ‘코로나’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 말부터 번지기 시작한 코로나는 올해 초 대한민국을 뒤집어 놓았다. 거리의 모든 이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 시작했고 집 밖으로 외출을 하지 않는 자가격리자들도 늘어났다. 잦아드는 듯 했으나 잠시 방심한 틈을 타 무섭게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는 현대인들에게 전염병의 위험성을 알려주고 있다. 코로나로 멈춘 사회 모습을 보면서 전염병이 퍼졌던 과거의 모습을 담은 미술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과거에 돌았던 전염병 중 가장 최악의 전염병으로 꼽힌 것은 단언컨대 페스트일 것이다. 매년 반복되는 기근과 영양실조 그리고 열악한 위생 상태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가량을 죽음으로 몰고 간 페스트를 불러왔다. 페스트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서 외부와 격리되었고 산채로 매장되었다. 의학 기술이나 정보 전달 방식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전염병의 여파가 무척이나 컸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이미지와 가까이 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죽음의 춤’이다.
죽음의 춤이란 중세 때 생겨난 예술 형태로 춤추는 죽음을 묘사한다. 죽음은 해골의 모습으로 나타나 춤을 추면서 산 자들을 데려간다. 최초의 죽음의 춤으로는 1350년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도원의 의뢰를 받아 제작된 그림 전지로 여기에는 라틴어로 된 텍스트가 붙어있다. 죽음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와 인간을 데려가기 때문에 이러한 그림에서는 죽음을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 묘사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의 목숨을 거둬들일 권리를 가지고 있는 존재다.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며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죽음의 춤은 인간들에게 그들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살아생전의 부와 권력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를 상기시킬 목적으로 생겨났다.
미카엘 볼게무트, <죽음의 무도>, 1493년, 목판화, 뉘른베르크 연대기 삽화
죽음의 춤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니타스’와 ‘메멘토 모리’다. ‘바니타스’는 ‘허무, 무가치, 공허’를 뜻하는 라틴어로 현세의 무상함에 대한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념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니타스는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제어할 권한이 없음을 보여주며 지금의 모든 것이 덧없음을 표현한다. 바니타스를 상징하는 모티프로는 해골, 빈 잔, 달팽이 껍질, 부인용 숄, 박쥐, 고양이, 앵무새, 시든 꽃, 그림자, 거울에 비친 상, 썩은 과일 등이 있다. 이런 상징들은 대부분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생명이 있는 것들이 점점 죽어가는 모습들로 나타나며 영원한 것은 없음을 상기시킨다. 바니타스는 서양미술사 전체를 꿰뚫고 있는 개념이기도 한데, 특히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작품으로는 마네의 ‘폴리베르제느의 술집’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그림의 중앙에는 젊은 종업원과 꽃이 등장하는데 이 소재들은 젊음,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없어진다는 뜻을 담고 있어 바니타스를 상징한다.
하르멘 스텐비크 Harmen Steenwyck, <정물-바니타스의 알레고리> Vanitas Still-Life, 1640,
Oil on panel, 39x51cm, National Gallery, London
마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1882, 유화, 97x130cm, The Courtauld Gallery
메멘토 모리 또한 같은 선상의 개념으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며 그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인간의 유한성을 되새기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삶의 달콤함을 즐김과 동시에 사후를 위해 종교를 믿고 참회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니클라우스 마누엘 도이치, <베른 죽음의 춤>, 1516~1519, 베른 수도원(17세기 복사본)
죽음의 춤에서 주목할 부분은 춤을 추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점이다. 춤을 추는 죽음 곁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은 몸을 돌리고 있거나, 죽음을 따라가기를 거부하는 제스처들을 보인다. 사람들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되새기며 사후를 위해 종교적으로 참회하기도, 때로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향락을 즐기기도 했다.
물론 현대 사회는 그때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전염병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코로나라는 이름의 죽음이 이곳 저곳에서 무도회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했다고 해도 인간은 여전히 전염병 앞에서는 과거나 지금이나 모두 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굳이 과거와의 차이점을 꼽아보자면, 현대판 죽음의 무도회에서는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