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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새로운 비너스를 향하여

박하은

더 새로운 비너스를 향하여

  바다로 던져진 우라노스의 거세된 성기 주위로 우윳빛 거품이 일더니 일순간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생겨났다. 미(美)의 아이콘으로 군림할 비너스가 탄생한 것이다. 기원전 2세기의 ‘밀로의 비너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루벤스의 ‘비너스와 아도니스’ 같은 작품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아몬드형의 큰 눈, 이마로부터 직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높은 코, 도톰한 입술을 지닌 비너스는 20세기 이상의 긴 시간 동안 미를 상징해왔다. 흰 피부의 비너스가 절대적인 미의 기준으로 뿌리내린 서양 문화권에서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가 전개될 여지는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샤를 코르디에(Charles Cordier)는 제국주의적인 태도와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에 경도되었던 서구 사회에 타자가 지니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827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나 생전에 큰 명성을 얻은 신고전주의 조각가 샤를 코르디에는 1847년에 수단 출신의 해방 노예인 세이드 앙케스(Seid Enkess)와 조우한 것을 기점으로 비서구인의 미를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동시대 예술가들이 오리엔탈리즘에 매료되어 타자를 신비롭지만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였던 것과 달리, 코르티에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의 모습을 참고한 리얼리즘 조각을 선보였다.


Charles Cordier, <Woman from the French Colonies>, 1861, 
Algerian onyx-marble, bronze and gilt bronze, enamel, amethyst, 95.9 x 59.1 x 31.1cm ⓒ The Metropolitan Museum

 1861년에 공개된 <프랑스 식민지의 여인 Woman from the French Colonies> [도 1] 은 인류학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다른 문화권의 미를 고찰하였던 코르디에 작업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채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알제리 여인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코르디에는 알제리에서 생산된 오닉스 마블과 전통적인 조각 재료인 청동을 능숙하게 다룸으로써 흑단 나무처럼 건강한 윤기를 지닌 아프리카인의 피부와 두껍게 주름진 의복을 탁월하게 재현하였다. 서구의 비너스가 미의 이데아를 대변하였던 것처럼, 코르디에 역시 특정 인물을 재현하기보다 알제리 지역에서 아름답다고 인식된 요소들을 모아 ‘아프리카 비너스’를 탄생시켰다. 그는 “모든 인종은 다른 인종과 구별되는 특유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가장 아름다운 흑인은 백인과 가장 닮지 않았다.”라고 발언하며 ‘미의 편재성’을 역설하였다. 코르디에는 백인을 특권층으로 인식하고 인종 간의 위계질서를 일정 수준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종종 인종주의자라는 비판에 직면하나, 그가 서구적인 아름다움만이 진정한 미로 인정되었던 시기에 새로운 아름다움을 알렸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코르디에의 작업은 객관적인 미의 기준이 있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아름답지 않은 것’을 도외시하는 배타적인 측면을 지닌다. 데비 한(Debbie Han)은 서구의 비너스와 비서구의 비너스를 병치하였던 코르디에로부터 전진하여 절대적인 미는 없으며, 모든 존재가 각자의 아름다움을 내재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현재 조각, 사진, 회화의 다양한 범주에서 미의 개념을 톺아보고 있는 데비 한은 2004년부터 2011년까지 <미의 조건 Terms of Beauty> 연작을 통하여 ‘영속하는 미’의 허구성을 지적함으로써 이데아와 현상의 경계를 붕괴시키고자 하였다. 매부리코의 비너스, 두툼한 입술의 비너스, 작은 눈의 비너스, 하관이 발달한 비너스, 거북목의 비너스처럼 가벼운 데포르메를 거친 전통적인 비너스 상의 사본들은 한 곳에 모여 ‘낯익은 낯섦’(uncanny)의 감정을 유발한다. 비너스 상과 미묘한 차이를 지니는 사본들이 결집한 공간에서 기존의 비너스 상은 원본의 지위를 상실한 채로 여러 형상 중 하나로 존재하게 된다. 이처럼 데비 한은 차이와 반복을 통하여 절대적인 미의 이데아를 무너뜨렸다. 이데아의 장막이 벗겨진 폐허 위에서 모든 사본은 고유의 가치를 획득하며 무엇인가의 사본이 아닌 독자적인 존재, 원본 그 자체로서 재탄생하게 된다. 데비 한은 차이로써 절대적인 미의 신화를 전복시킴과 동시에 작품의 재료를 통하여 다시 한 번 절대적인 미의 기준을 비판하였다. 2010년의 <미의 조건 VII Terms of Beauty VII> [도 2] 은 청동으로 주조된 작품으로, 데비 한은 산화된 조각상을 그대로 전시함으로써 비너스로 대변되는 미의 기준이 찰나적임을 폭로하였다. 완성 당시 언제까지나 견고하게 유지될 것 같았던 작품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녹슬어가는 것은 영원한 아름다움의 허구성에 대한 은유다. 


Debbie Han, <Terms of Beauty VII>, 2010 ⓒ Debbie Han

 데비 한의 작업은 절대적 미라고 신봉되었던 것의 허구성과 일시성을 가시화하여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의 경계를 허물었다. 견고한 장벽이 무너진 아름다움은 모든 개체를 포용하는 드넓은 대지로 재탄생하며, 그 위에서는 누구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 2015년에 뉴욕 리코 마레스카 갤러리(Ricco Maresca Gallery)에서 열린 데비 한의 개인전 ‘여기 그리고 지금’(Here and Now)이라는 제목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는 먼 곳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때, 비너스는 관능과 미의 베일을 벗어 던지고 모두를 너른 품에 껴안는 사랑의 신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박하은 pheun0507@gmail.com

참고문헌
Alexandra Rossi, “Here and Now”, Fluence Magazine, 3, 2015.
Laure de Margerie, Edouard Papet, 『Facing the other: Charles Cordier (1827-1905):  Ethnographic sculptor』, New York: Harry N. Abrams, 2004.
변경희, 「Debbie Han’s Graces: Hybridity and Universality」, 『현대미술사연구』, 46, 2019, pp. 19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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