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주의 미술의 대표자, 앙리 마티스
야수주의는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최초의 전위미술 운동이다. 당시 프랑스는 자연주의라고 하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미술을 지향했으나 이에 대항하는 세력이 있었고, 그 세력을 야수주의라고 한다. 야수주의는 미술비평가 루이 복셀이 잡지 평론에서 “야수들에 둘러싸인 도나텔로!”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여 야수주의라고 불리게 되었다. 야수주의 집단에 속하는 야수주의자들은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는 객관적인 시각보다는 사물의 다양한 배열과 변형이 자유로운 주관적인 세계에 집중했다. 작품을 표현할 때는 ‘야수주의’라는 명칭에 붙은 ‘야수’처럼 과감하고 거칠게 붓 터치를 하고, 색채 표현에서는 물감 튜브에서 직접 짠 듯한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가 나타난다.
야수주의자의 큰 목적은 색채의 해방에 있었다. 그들은 “본다는 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야수주의자는 화가의 개성은 창작의 원천이 된다고 보았고 이것을 작품에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강조하는 작품은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색채 표현을 강조하고 거리감, 깊이감 표현을 덜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색채 자체는 이들 회화의 중요한 목적이 되었고 사실적인 묘사에서는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이들의 대표적인 지도자는 앙리 마티스이다. 앙리 마티스는 다른 야수주의자들과 같이 작품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창조하고 내면의 표현에 집중했다. 물론 당시 유행하던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풍경화 작품도 남아 있지만, 점차 인상주의 회화가 보여주는 자연주의적 묘사에서 벗어났다. 그러면서 원색과 붓 터치로 사물을 변형하고 단순화했으며 주관적인 감정을 색채로 표현하는 야수주의 회화 기법을 사용했다.
<붉은 화실>, 181x219.1cm, 캔버스에 유채물감, MoMA, 1911
앙리 마티스의 <붉은 화실>은 작품을 바라보는 작가의 주관적인 시야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작품의 공간은 평면의 붉은색으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실제 마티스의 작업실의 벽면이 흰색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것을 보아 작가의 주관이 반영된 표현이 드러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작업실 공간 안에는 작가가 제작했던 다양한 작품, 시계, 서랍장, 책상, 의자와 같은 가구를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 가구들은 다소 투명한 윤곽선과 대각선으로 처리되어 공간을 시사하지만, 공간의 색채가 평면적인 붉은색이라는 점에서 작업실 공간 그 자체는 비물리적인 공간의 형태를 띤다. 특히 공간의 모서리에 나타나는 선이 사라져서 비물리적 공간의 느낌은 한층 강조된다. 그리고 중앙에 놓여 있는 괘종시계를 보면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시계와 달리 바늘이 없다. 이것은 작품의 공간이 시간의 흐름이 없는 무시간적 공간임을 의미한다. 즉, 작가는 이 공간을 실제와 상상의 중간 단계에 설정하고 있다. 이 공간 안에 유일하게 물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가 제작했던 작품들이며, 전경에 놓인 크레파스는 작가의 창작,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대상이다. 따라서 작가가 펼치는 창작의 공간은 이 작품의 핵심 주제가 된다.
앙리 마티스 <저녁 식탁>, 100x131cm, 캔버스에 유채물감, 1897
앙리 마티스 <붉은색의 조화>, 캔버스에 유채, 181x200cm,, 1908, 예르미타시 미술관
앙리 마티스의 <저녁 식탁>은 여성 인물이 실내 공간에서 저녁 식탁을 차리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테이블을 비스듬히 배치하여 작품을 원경과 근경에서 바라보는 시점의 차이를 나타내고 인물과 각 사물의 부피의 차이가 잘 구분되어 있다. 이와 유사한 작가의 작품이 있다면 <붉은색의 조화>를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주제 면에서 <저녁 식탁>과 유사하다. 두 작품 모두 여성 인물을 실내에 배치하고 저녁을 차리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주제를 제외하고는 다소 차이점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저녁 식탁>은 빛이 있고 거리감, 부피감을 강조하고 있다면 <붉은색의 조화>는 모든 것이 평면화되어 있고 ‘빛’이라는 소재와 거리가 먼 작품이다. 그리고 접시를 준비하고 있는 여인, 탁자의 윤곽선을 보면 어느 정도의 원근감을 표현하고 있지만, 평면적인 빨강 배경으로 인해 관람자들에게 추상적인 공간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두 작품의 차이점은 변화된 마티스의 화풍과 연결된다. 1800년대의 마티스는 루브르에서 인상파와 신인상파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에 자신의 작품을 반영했다. 그래서 보이는 것과 같이 빛과 입체가 작품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하지만 1900년대에는 야수주의자 대표 멤버로 활약하면서 거친 붓질과 색채 표현, 틀에 맞추지 않은 자신의 주관에 의한 미술 작품을 선보였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표현이다. 나에게 표현은 인간의 얼굴에 나타나는 열정에 있다거나 격한 움직임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그림 전체 구성이 표현적이다.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는 장소, 그들 주위의 빈 공간, 비례, 이 모든 것이 각자의 역할을 한다. 구성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화가가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를 장식적인 방식으로 배열하는 기술이다.”
마티스 <화가의 기록>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