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품팔이 노동자였던 화가, 산업화 속 인간 소외를 그리다.
◆ 산업화와 화가
우리나라의 산업화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은 산업화를 통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지만, 급격한 성장은 사회 전반에 부작용을 가져왔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 보편화된 거대 조직과 관료제는 인간을 조직의 부품으로 전락시키고, 자동화된 생산 구조에서 인간은 이계에 의해 소외당하게 된다. 또한, 경쟁적 사회 구조 속에서 인간은 다른 사람으로부터도 소외되고, 인간 자체가 고유한 인격이나 개성보다는 상품적 가치에 의해 물질적으로 평가되는 현상을 겪었다. 한국의 이러한 현상은 산업화가 시작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의 처우 개선 문제는 노동자들의 요구가 없으면 문제시 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의 권리 보장을 위한 외침은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산업화로 인한 인간소외 현상은 한국뿐만 아니라 산업화를 겪은 국가 대부분이 겪어야만 했다. 예를 들면, 일본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미국의 경제 지원에 힘입어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사회적 상황을 그림으로 나타낸 작가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조양규(曺良奎)이다.
◆ 좌익학생활동과 밀항
1959년 조양규의 모습
조양규는 1928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대학교 입학 전까지 그의 성장 과정은 밝혀진 바가 많지 않다. 그는 1942년 진주사범학교에 입학하였고 재학 당시 좌익계인 ‘학생동맹’에 가입하여 공산주의 이론 강의를 듣고 좌익학생활동을 했다. 1946년 진주중안초등학교에 부임하였으나, 교내에서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해직 당한다. 이후 경찰의 수배를 피해 어머니 집으로 잠시 피신하였다가 수배가 어머니 집에까지 이르자 여수 사호도의 친척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약 4개월간 그곳 외양간을 개조해 숨어 지낸다. 1947년 9월 부산으로 도피 중에 우연히 만난 사범학교 동기생의 도움으로 부산 토성초등학교에 부임한다. 하지만 1948년 10월 한 학생에게 인공기를 달게 한 사건이 발각되어 일본으로 밀항한다.
가난한 외국인이었던 그는 도쿄 에다가와죠에 있는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에 거주하며 창고에서 인부로 일했다. 그리고 그림공부를 위해 무사시노 미술학교에 입학하지만, 생활고로 중퇴하고 만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재일조선인 조직에서 기관지의 표지나 삽화를 그리고, 《일본앙데팡당전》, 《자유미술전》등의 일본 내 미술 전람회에 꾸준히 참가하였다. 이후 그는 개인전까지 개최할 만큼 일본 화단에서 주목받는 화가가 되어 작품 활동을 활발히 이어나갔다. 하지만 1959년 재일동포 북조선 귀국사업이 시작되었고 1960년 10월 조양규는 귀국선을 타고 평양으로 가게 된다.
◆ 날품팔이 노동자
조양규, 〈31번 창고〉, 1955, 캔버스에 유채, 65.2×53㎝, 광주시립미술관
그는 일본으로 간 뒤 가난한 외국인으로서 동경의 조선소와 인근 항구에서 창고 인부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조양규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55년경부터 창고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부터 전쟁 배상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경제불황에 시달리게 될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전쟁에 군수물자를 조달하게 되면서 국가적 경제 위기를 모면하고 창고에 국가적 잉여자본을 쌓게 되면서 경제부흥을 누리게 되었다. 당시 조양규는 한국전쟁으로 일본이 누리고 있는 특수(特需) 상황을 목격함과 동시에 에다가와죠 조선인 부락에서 창고지기로 근무하며 재일조선인의 삶을 경험했고 그것을 창고 연작에 반영한 것이었다.
조양규에게 ‘창고’이미지는 하층 노동자의 노동착취가 이루어지는 단면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함을 내포한다. 그에게 창고는 인간이 자기의 노동에 대한 뿌듯함과 존엄을 갖지 못한 채 그저 최저생계만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본주의 사회기구의 상징이었다. 또한, 그는 창고 이미지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에서 꼭 필요한 존재임에도 오히려 소외되는 노동자의 모습을 표현했다.
창고 연작에서 인물들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매우 작게 표현되어 있다. 감정을 표현하여 의사소통할 수 있는 인간의 얼굴을 작게 표현한 것은 노동 과정에서 노동자의 감정은 배제되고 경시되며, 노동자가 자본가에 의해 수동적으로만 움직이는 존재가 된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신체 중 손과 발을 특히 크고 두꺼운 모습으로 나타내어, 결국 인간이 노동 과정에서 하나의 수단이 되어버린 것을 표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두터운 마티에르로 인물의 얼굴과 몸을 표현하였다. 얼굴부분은 물감이 마르면서 일부를 벗겨 낸 듯하고 몸은 날카로운 펜이나 헤라 등으로 긁어내었으며 창고 문은 마치 벽돌 모양과 같은 마티에르로 표현한 것이다. 인물이 두터운 마티에르로 표현되어 사실적 묘사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다소 흉물스러운 모습이다. 이러한 표현은 작가가 그림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자본주의 사회 현실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 맨홀 속에서 일본 사회를 관통하다
조양규, 〈맨홀 A〉, 1958, 작품정보 미상,『조양규화집』 수록
그는 창고 연작에 이어 1958년부터 맨홀 연작을 제작했다. 맨홀 연작에서는 맨홀과 창고 연작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이 주인공이 되었다. 인물은 거칠고 단단한 손으로 지면을 지탱하며 둥그런 맨홀 밖을 내다보고 있다. 맨홀은 도시재개발 현장의 상징이며 노동자들은 이러한 시스템이 양산한 존재이다. 급격한 자본주의 속 인물의 무표정한 얼굴과 맨홀은 당시 일본 사회의 내면을 보여준다. 작가는 “우리가 그 위를 걸어 다니기도 하고, 거기에 서 있기도 하면서도 대상사물에 대한 인식을 그다지 하지 않고 지나치는 맨홀과, 거기에서 일하는 하수도 공사 인부와의 관계”에 주목했다. 조양규는 창고 연작에서와 마찬가지로 맨홀 연작에서도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비롯된 인간소외를 보여주었다. 맨홀과 맨홀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존재는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 사회와 회화와의 관계를 고민했던 화가
1959년부터 진행된 재일조선인의 북한 귀국 사업에 호응해 북행을 택한 재일조선인 화가는 대략 15명 내외로 추정된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북한미술계에 성공적으로 정착했고 오늘까지도 북한미술의 원로로 대접받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19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북한미술의 주류에서 밀려나 잊혔다. 후자를 대표하는 작가가 바로 조양규이다.
조양규는 북한에 도착한 직후 체코슬로바키아로 유학을 갔을 정도로 북한에서 재일조선인 화가의 대표자로 주목받았지만,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북한미술계에서 사라진다. 이에 대해 여러 연구자는 그가 북한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조양규는 1948년부터 1960년, 북한으로 떠나기 전까지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는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으로 산다는 것의 한계, 과거 전적 때문에 남한으로 갈 수 없는 상황, 가족 관계 같은 원인으로 북한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모국으로 돌아간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항상 자신의 체험을 중시했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경험한 사회를 함축하여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조선의 인물과 풍경으로 조선 사회를 표현하고자 갈구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모티브 자체가 사회적 관계를 가진다는 필연을 발전적으로 끝까지 모색해 본다면 문제의식의 표현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사회와 회화와의 관계를 고민했던 화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