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고목과 여인, 1960년대 전반, 캔버스에 유채, 45×38cm, 리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란 부제로 박수근 전시가 열리고 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전시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박수근의 생애 및 회화 세계를 조명한 이번 전시회는 설렘 반 기대 반을 느끼게 했다. 전시는 작가가 활발하게 활동한 1950년대 초부터 작고한 1965년 무렵까지 창신동 거주 시절을 주요배경으로 삼았다. 잘 알려진 작가의 독특한 화풍은 단단한 화강암을 연상시키는 마티에르(Matiere)기법을 활용하여 다소 어둡고 짙은 톤의 캔버스 바탕에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시켜 보일 듯 말 듯 앉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물체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문질러 생기는 질감 효과를 나타낸 프로타주(Frottage) 작품인 당초문 암막새 및 민화, 와당, 전돌, 토기 등의 전통미술에서 소재를 얻어 제작한 스케치와 습작, 더 나아가 판화, 펜화에 이르기까지 그간 접하지 못했던 그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가 있어 안복을 누리기에 충분했다. 이와 별도로 독학한 작가가 미술 잡지 기사를 모아 만든 스크랩북에 당시 뉴욕을 중심으로 유행한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인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작업 및 작품 사진을 소중히 보존해 온 점을 미루어 당시 유행한 사조나 기법에서도 영감을 얻지 않았나 짐작해본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는 문학의 스토리텔링과 미술의 만남이라는 기획으로 관람객의 관심과 상상력을 능동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박완서가 1970년 『여성동아』의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서 「나목」으로 당선되었는데 이 소설은 작가가 한국전쟁 직후 미군PX에서 생계형 가장으로 일할 당시, 미군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박수근을 만나 그를 모델로 일부 상상력을 동원하여 집필한 작품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일화(逸話) 한 토막을 잠자는 지면(紙面)에서 끄집어내 주요 테마로 기획한 점이 절묘했으며, 스토리텔링이란 개념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해주었다.
전시를 보면서 영국이 자랑하는 19세기 미술공예운동을 주창한 장식 예술가 윌리엄 모리스(1834-96)가 오버랩 되었다. 그는 중세 고딕 예술을 바탕으로 꽃, 열매, 과일, 나뭇잎 등의 반복적인 무늬를 이용한 자연주의적 디자인을 벽지, 태피스트리, 카펫, 스테인드글라스 등에 간결하게 적용하였다. 박수근과 윌리엄 모리스는 성장 배경과 환경은 달랐지만, 전지적 관점에서 자연의 사물을 보고 자신만의 특정한 해석을 통해 작품으로 풀어냈다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다만 두 작가가 공예와 작품에서 표현한 “노동”이란 철학은 숭고함이라는 대의(大義)는 유사하지만, 제작 과정으로 진입하면 다소 개념을 달리한다. 윌리엄 모리스는 신성한 노동(수공업)을 통해 생활예술의 완성을 추구하며 고전양식으로 회귀와 부활을 꿈꾼 반면에, 박수근은 일상의 노동에 충실한 이웃의 여성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존경을 보내며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견뎌낸 벌거벗은 나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봄을 맞이하듯 이들에게도 좀 더 편안한 삶이 오기를 함께 기다렸던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기다림과 부활을 꿈꾸었지만, 본인의 의지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다음 세대에 과제로 남기고 눈을 감은 점도 또 하나 공통분모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