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전시 참여작가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으로 하여금 작가의 작품 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1, 양림동 빈집
부딪치는 바람의 역사화(化), 미라 만(Mira Mann)
김아정
너스 캡(nurse cap), 찻잔, 분홍빛 족두리를 얹은 카세트 라디오, 꽹과리가 길이 9.6m의 스테인리스스틸 선반 위에 늘어서 있다. 눈이 부시게 빛나는 알전구들이 달린 거울에는 곳곳에 여성들의 사진이 붙어있고 반대편 벽 앞에 자리한 북이 비친다. 도무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물들은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가로질러 모인 듯하다. 언뜻 보면 누군가의 화장대 또는 무대 뒤의 분장실을 연상케 하는 이 설치물은 파독 간호사를 기리는 파노라마식 기념비이다. 목포 출신의 한국인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 미라 만(이하 만)의 신작 〈바람의 사물 Objects of the Wind〉(2024)은 한국의 전통적인 서사무가(敍事巫歌) 「바리공주」와 판소리 「심청가」를 파독 간호사의 역사와 병치한다[도 1].1)
무당들이 굿판에서 부르던 노래의 한 레퍼토리인 「바리공주」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먼 옛날 불라국을 다스리던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의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난 바리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옥함에 갇혀 바다에 버려졌다. 바다 건너 비리공덕할멈 내외에게 거두어진 바리가 열다섯 살까지 자랐을 무렵, 몸져누운 오구대왕을 살릴 수 있는 약수는 일곱째 공주만이 구할 수 있다는 도승의 말에 시종 하나가 바리를 찾아온다. 바리는 오구대왕을 위해 서천서역(西天西域), 즉 저승으로 향하고 밭 가는 노인과 천태산 마고할미, 동수자의 시험을 거쳐 약수를 구한다. 불라국으로 돌아왔을 때 오구대왕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지만 바리가 그의 입에 약수를 흘려 넣자 숨을 되찾았다. 오구대왕이 건네는 부귀를 마다한 바리는 저승으로 들어서는 영혼을 인도하는 오구신이 된다.
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심청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심청가」는 「바리공주」 못지않게 극진한 효녀 서사를 다룬다. 장님인 심봉사는 느지막이 심청을 얻지만 출산한 부인이 7일 만에 이승을 하직하여 젖동냥으로 딸을 기른다. 열다섯 살이 된 심청은 공양미 삼백 석을 시주하면 아버지가 개안할 수 있다는 화주승의 말을 듣게 된다. 제물을 구하는 뱃사람들에게 공양미 삼백 석을 받고 인당수에 몸을 던지지만 옥황상제에 의해 수궁을 거쳐 다시 지상으로 보내진 심청은 황후가 되어 맹인 잔치를 연다. 그때까지 눈을 뜨지 못하고 있던 심봉사가 소식을 들어 잔치에 참여하였고 심청과 재회한 심봉사를 포함해 전국의 모든 맹인이 광명을 찾게 된다.
「바리공주」와 「심청가」는 대표적인 구비 서사시로 먼 과거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무수히 변형되었다. 그렇게 쌓인 오랜 기억은 바람이 불어오듯 현대까지 이어져왔다. 이세계(異世界)에 다녀오며 고난과 역경을 겪은 바리와 심청의 기행은 이역만리로 넘어가 여성에 특정된 노동을 수행한 파독 간호사의 여정과 겹쳐 보인다. 서독의 간호인력 부족 문제와 외화에 대한 한국의 수요가 맞물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만 명 이상의 한국인 여성이 민간·선교사·정부 모집을 통해 독일에 파견되었다. 〈바람의 사물〉은 만의 이모 양승자씨를 포함한 파독 간호사들과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그들의 개인적인 경험과 집단적 실천을 이야기한다. 작품의 사물들과 사진은 이들의 소장품을 비롯해 쾰른 이주민 문서센터(DOMiD)와 베를린 디아코니 아카이브(Diakonie Archive)로부터 수집한 자료들이다. 라디오에서는 파독 간호사들이 민중문화모임, 베를린 가야무용단, 재독 한인여성모임과 한데 모여 풍물을 연습하는 40분짜리 퍼포먼스 사운드가 흘러나온다. 본래 꽹과리, 징, 장구, 북을 위시한 사물(四物)을 가리키는 ‘풍물’은 악기 뿐 아니라 음악 그 자체를 의미한다. 꽹과리, 징, 장구, 북이 각각 천둥번개 소리, 바람소리, 빗소리, 구름이 떠가는 소리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풍물(風物)은 ‘바람의 사물’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바람의 사물〉은 큰 소리로 악기를 두드리는 파독 간호사를 바리·심청과 중첩하여, 자식으로서의 효심과 여성으로서의 순종을 미덕으로 요구해 온 사회에 저항하고 국가주의에 대한 희생과 돌봄의 역할에 불응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리와 심청, 그리고 파독 간호사를 가부장제의 피해자이자 수동적인 존재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아버지를 위해서라지만 바리와 심청은 왜 그리도 먼 곳까지 가야 했을까? 바리와 심청 이야기 속 ‘먼 곳으로의 이동’은 그 자체로 끝없는 자기 확신의 과정이자 도전과 성취의 모티프이다. 사회와 가족에 대한 기여를 강요당했던 당시의 맥락에서 분리될 수는 없지만, 파독 간호사들의 이동은 개인적이고 진취적인 주체로서의 선택이기도 했다. 물론 모두가 삶을 성공적으로 개척한 것은 아니었으나 파독 간호사들은 동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낯선 땅에서 자신의 역할을 모색했다. 한국의 세 번째 여성 대사를 지낸 김영희는 ‘저 멀리 내가 모르는 넓은 세상에 언젠가는 가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국을 떠나 파독 간호보조원이 되었다. 22세에 파독 간호사에 지원했고 이후 독일에서 병원장을 지낸 박경남은 ‘여자가 대학에 가서 뭐 하냐며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게 했어요. 늘 가슴이 답답하고, 한국에서 뛰쳐나가야겠단 생각뿐이었어요. 해방돼 자유를 찾고 싶었지요’라고 말했다.2) 세차게 터져 나오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만의 작품에서 풍물의 드센 소리와 거울의 밝은 조명이 뿜어내는 빛으로 표현된다.
만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연대(連帶)를 조명한다. 밭 가는 노인이 길을 알려주는 조건으로 밭을 갈아두라고 했을 때 바리 대신 밭을 갈아준 짐승들이 있었고, 요절한 어머니를 대신해 심청에게 젖을 먹인 아낙네들이 있었듯이 파독 간호사들은 서로가 서로의 조력자였다. 이는 다시 풍물놀이의 참여적 실천으로 이어진다. 향수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낼 때 한국 춤과 음악으로 그리움을 달래던 것을 시작으로 2015년 구성된 파독 간호사 무용단은 풍물, 진도북춤, 부채춤 등을 연마하고 정기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3) 만의 〈바람의 사물〉은 국제화라는 시대적 상황에 탑승해 바람처럼 타지로 떠난 여성들이 낯선 환경에서 부딪치고 휘어지고 서로 위로하는 인생의 파노라마를 시청각으로 집약한다. 전시관 1의 끝 무렵에 닿은 관람객은 만의 작업을 지나며 바람의 사물(objects)을 눈에 담고 바람의 사물(四物)을 귀로 듣는다.
광주비엔날레 본관에서 발생한 만의 소리는 ‘소리숲’을 주제로 한 장외 섹션, 양림동의 빈집으로 공명한다. 이이남 스튜디오에 들어서는 길목에는 전시 공간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폐가가 한 채 있다. 이곳에서 만은 이전부터 탐구해 온 심청에 대한 재해석을 선보인다. 정돈되지 않은 수풀, 벗겨진 벽지, 켜켜이 쌓인 먼지 등 생명의 오랜 부재를 암시하는 빈집의 1층에 들어서자,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판소리 해설가 소솔이가 부른 「심청가」가 안방으로부터 흘러나온다. 3대의 텔레비전 수상기로 송출되는 영상 〈엄마의 기억은 다를 수도 Mother May Recall Another〉(2022)는 심청으로 분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가족을 위한 희생과 이주, 억압의 기억 등 개인의 정체성을 탐색한다.
영상 속에서는 식민지 무역을 통해 획득한 물품들을 전시한 쾰른의 동아시아미술관,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총독부 목포 지부였던 건물, 일제강점기에 내화벽돌을 생산하던 조선내화 목포공장 폐허, 그리고 뒤셀도르프에 있는 만의 스튜디오 등을 배경으로 작가 자신과 사촌들, 작가의 어머니와 이모, 드랙(drag) 아티스트 장13(Chang13), 독일 케이팝 댄서 그룹 무지갯빛 날개(Iridescent Wings)가 자기만의 심청을 연기한다. 주거자의 온기는 없이 거주의 흔적만 남은 폐가라는 장소는 과거의 수탈을 상징하는 영상 속 폐건물들과 조응하는 한편 작가가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고안하는 현재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만의 스튜디오에도 비견된다. 만은 효녀 심청 이야기에 이민자인 어머니의 서사를 통합하고, 개인적인 경험이 공유됨으로써 공적인 기억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유교적인 사회통념과 젠더 위계, 제국주의의 그늘을 뒤로하고 현대 사회의 다원주의적 가치를 모색하는 ‘판’을 마련한다.
만의 참여 지향적 작업은 비디오와 사운드, 드로잉을 결합한 참여형 퍼포먼스 〈음의 눈, 눈의 음 Eye of Song, Song of Eye〉(2024)으로 확장되어 공간과 소리의 관계를 살핀다[도 2]. 빈집의 외벽에는 문을 들고 날 때마다 명심하라는 듯, 한 면 가득 ‘충효전가(忠孝專家) 청정안민(淸政安民)’으로 시작하는 글귀가 적혀있다. 〈음의 눈, 눈의 음〉의 비디오 사운드에서 소솔이가 내는 의성어 판소리는 유교적 가치를 설파하는 이 명문에 대한 2024년의 응답이다. 전시장을 방문한 어린이들은 장지를 바른 방의 벽과 바닥에 붓과 먹을 이용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 작가는 바리와 심청 이야기, 판소리에 대한 어린이들의 능동적인 독해와 감각적인 인식, 독특한 상상력을 이끌어낸다. 원초적인 감상을 표현하는 어린이들의 참여는 만의 작업에 대한 관람객의 즉각적인 반향(echo)으로 기능한다. 이 참여형 작업은 전시 기간 내내 방 안을 가득 채우며 빼곡해진다.
광주비엔날레 본전시관과 양림동 빈집을 연결하는 만의 작업은 세 단계로 진화한다. 내러티브를 시각 및 청각으로 재현하고, 개인의 자아를 집단의 기억과 디아스포라적 서사로 역사화하며, 관람객의 직접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 자신이기도, 엄마나 이모이기도, 이민자 또는 타자이기도 한 이야기 주체들이 이주하며 문화가 새롭게 이식되고 다층적인 맥락이 생성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탈중심적 사유를 제안하는 만의 작품을 통해 문화적 연대와 상호작용, 지정학적 역학관계를 반영하는 미술의 가능성을 재고할 수 있다. 바리와 심청의 이야기가 바람처럼 구전되어 오다 20세기 들어 문학의 영역에서 기록되었듯이, 만의 작업은 시공간을 횡단하는 파독 간호사, 나아가 이동하는 여성들의 진취적 경험과 정체성을 재해석하여 미술의 영역에 정착시키려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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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아정 (1996-) kaj0818@naver.com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재학. 역사문화학과 교육학을 전공했다. 미술이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생각으로 과거와 현재 또는 고전과 현대를 연결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1) 미라 만(Mira Mann, b.1993)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하여 뒤셀도르프를 기반으로 작업한다.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Kunstakademie Düsseldorf)를 졸업했으며 현재 쾰른 소재 드라이 갤러리(Galerie DREI)에 소속되어 있다. 조각, 영상, 설치 오브제 등 매체를 넘나들며 인간, 소리, 의식, 사물의 이동을 다룬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체성의 상호작용 속에서 집단기억, 사회구조, 새로운 서사를 시각화하는 수단으로서 스토리텔링을 탐구한다. 작가의 약력은 https://drei.cologne/wp-content/uploads/2022/10/CV_MiraMann-3.pdf에서 읽어볼 수 있다.
미라 만, 〈바람의 사물 Objects of the Wind〉, 2024,
거울, 조명, 스테인리스스틸 선반, 진도 북, 다양한 사물 및 인쇄물, 110 × 960 × 35 cm, 40분,
작가 및 드라이 갤러리(쾰른), N/A 갤러리(서울) 제공,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션. ©사진: 광주비엔날레 제공
미라 만, 〈음의 눈, 눈의 음 Eye of Song, Song of Eye〉, 2024,
지속적 참여 드로잉(소리: 소솔이), CTR 텔레비전, 장지, 붓, 먹. ©사진: 광주비엔날레 제공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