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 《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따라서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참여작가들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
Welcome to WDGF(World DJ Gwangju Festival) Remixed by Nicolas bourriaud
박제언
2024년 DJ 씬에서 하나 영상이 밈(meme)으로 떠올랐다. 바로 영국 인플루언서 매들린 아기(Medline Argy)의 영상이다. “디제이들이 하는 일이 도대체 뭐야? 그냥 남의 음악을 믹싱하고 그걸 틀기만 하잖아…” 인플루언서 매들리 아기는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말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그녀의 말은 단순한 투정이 아니라, ‘창작자’가 아닌 ‘플리 재생자’(Play List Player)로만 역할하는 DJ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였다. 그런데 이 영상은 캐나다 DJ 듀오 라우드 럭셔리(Loud Luxury)에 의해 그대로 리믹스(Remix)된다. 그녀의 눈물 섞인 항의는 비트 위에 샘플링되고, 분절되고, 리듬으로 가공된다. 그 감정의 맥락은 흐려지고, 남은 건 그저 터지는 드롭과 BPM뿐이다.
2024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은 내게 이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니콜라 부리오는 한국의 ‘판소리’를 제목으로 차용하며, 세계를 구성하는 판계아의 ‘판’과 한국적 정서인 ‘판소리’그리고 시각예술에서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는 시각 대신 청각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의 개념을 섞어 광주와 한국, 그리고 동시대 글로벌 현실을 하나의 믹스셋으로 엮어냈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전시장이 DJ 부스가 되고, 작가들과 작품들은 그의 트랙 속에 배치되는 구조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이 있다. DJ라우드 럭셔리가 매들린 아기의 눈물을 리믹스하면서 탄생한 것은 유희적인 비꼬기와 시니컬한 리듬이고 소실된것은 매들린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였다, 니콜라 부리오가 광주비엔날레를 판소리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은 무엇이고, 소실된 것은 무엇일까.
문화를 어떻게 디제잉 하는가 . 부리오의 믹스셋 전략
니콜라 부리오가 2024 광주비엔날레를 큐레이팅하며 선택한 방식은 전통적인 비엔날레 전시의 서사에서 벗어난다. 그는 《판소리: 모두의 울림》이라는 제목 아래, 시각예술에 시각대신 청각적 감각을 앞세우고, 지역의 역사와 세계적 이슈를 하나의 믹스셋처럼 엮어냈다. ‘판’은 지질학적 단층선이자 세계 정치의 긴장 구조이고, ‘소리’는 사운드스케이프를 통한 감각적 충돌이며, ‘판소리’는 한국 고유의 정서와 서사 형식이다. 하지만 이 세 요소는 그 자체의 무게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리오는 이들을 믹싱하고 리듬화함으로써, 관람객이 새로운 트랙을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이 전시는 감상이라기보다는 청취이며, 이해라기보다는 플레이에 가깝다.
본 전시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작품은 캔디스 윌리엄스의 콜라주 시리즈 《백인들이 우리를 모두 죽이기 위해 만들어 낸 신과 괴물들》(2024)이다. 작품의 제목은 전시 전체의 감정 곡선을 선명하게 설정한다. 킹콩,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백인 여배우, 흑인 병사, 아프리카 식민지 지식인 등 다양한 이미지들이 뒤섞여 구성된 이 콜라주는, ‘서사’가 아니라 ‘샘플’로 편집된 시각적 믹스셋이다. 윌리엄스는 감정을 직설적으로 외치지 않는다. 대신 시선과 시선 사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충돌을 삽입한다. 이 작품은 부리오의 기획 의도에 맞춰 “‘부딪침 소리’의 리듬”을 구현하는 트랙처럼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관객이 감지하게 되는 것은 리듬이라기보다는 분노와 절규다. 윌리엄스의 작품은 ‘소리’를 상상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 ‘침묵 속의 아우성’을 되살린다.
이어지는 2관에서 작가 미라 만(Mira Mann)의 설치 및 퍼포먼스 작업 《바람의 사물》(2024)이 관객을 맞이한다. 분장실처럼 꾸며진 공간 안에는 향수를 자아내는 구식 소품과 파독 간호사들의 이미지, 그리고 풍물패가 등장해 북과 장구를 들고 소리를 낸다. 이 퍼포먼스는 시각적 전시를 청각적 퍼포먼스로 전환시키며, 말 그대로 공간을 '울리게' 한다. 부리오는 이 작품을 '소리'라는 테마 아래 ‘겹침’이라는 소주제로 배치하며, 과거의 노동과 이주의 기억을 리믹스된 서사로 구성한다. 그러나 이때 중요한 것은, 이 소리들이 누구의 목소리로부터 나왔는가, 그리고 그 소리들이 누구에게 들리는가라는 점이다. 부리오의 믹스셋 속에서 ‘판소리’는 전통적 서사의 리듬으로 기능하기보다는, 리드미컬한 경험의 일부로 소화된다. 감정의 진원은 퍼포먼스 속 배우들의 몸에 있고, 그 감정은 다시 부리오의 큐레이션 속에서 정제되고 믹싱되어 버린다.
그리고 3 갤러리에 이르면, 맥스 후퍼 슈나이더(Max Hooper Schneider)의 대형 설치 작업 《용해의 들판》(2024)이 등장한다. 이 작품은 일견 아름답다. 식물, 빛, 유기적 조형물이 도시의 폐기물 더미 위에 조화롭게 펼쳐져 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그것은 포스트-자연, 즉 인간이 만든 인공 생태계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인류세’ 이후의 세계를 상상한다. 부리오는 이 작업을 통해 폐허와 희망, 인공과 생명의 이중적 리듬을 전시장에 배치한다. 마치 자연의 목소리를 리믹스한 ‘에코 트랙’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감각의 재현 또한 의문을 낳는다. 그 안의 폐기물은 누구의 쓰레기인가? 그 자연은 누구의 손으로 구성되었는가? 믹싱된 풍경은 아름답지만, 그 안의 책임과 맥락은 흐려진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판소리’처럼 리듬화된 서사 속에 윤리적 질문이 묻혀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1)
디제잉에서 누락되는 것들 . 판소리, 판/소리, 그리고 광주
니콜라 부리오는 ‘판소리’라는 제목 아래, 전시를 감각적으로 믹스했다. 그러나 그 디제잉의 과정에서 무엇이 남고, 무엇이 지워졌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미술비평가 강수미는 이번 전시가 “창조적 오독”의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번 광주비엔날레 본전시가 ‘5.18’과 ‘광주정신’에 크게 구애받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양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 과거사와 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예술적 물신화를 피했기에 긍정적이지만, 그 사건의 진실이 ‘판소리’에 관한 창조적 오독 속에서 눈멀고 귀먹을까 두렵다.”(강수미, 쿨투라, 2024, 125호)
부리오는 전통예술로서의 판소리를 '판(plate)'과 '소리(sound)'라는 말장난처럼 해체함으로써, 그 안에 담긴 역사성, 민족성, 장소성을 지워버리고 대신 생태주의와 세계가 연결된 판계아로서의 감각, 그리고 동시대적인 문제의식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이와 같은 해체 방식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일찍이 진단한 바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위기에서 아우라의 해체 개념과도 겹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은 원본을 재구성하고, 감정과 경험을 편집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예술의 존재론적 고유성.즉 아우라.는 사라진다. 감정은 샘플링되고, 서사는 리믹스된다. 이때 예술은 기억이 아니라 순간적인 경험의 효과로 작동한다. 그리고 니콜라 부리오는 이러한 동시대의 풍경을 ‘포스트프로덕션’의 시대로 진단하며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동시대 예술작품은 ‘창조적 과정’의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 항해의 장이며, 포털인 동시에, 행위의 발생인이다. 우리는 프로덕션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고, 기호의 네트워크에서 서핑을 하며 기존의 라인들에 우리 자신의 형식들을 끼워넣는다”
- 니콜라 부리오, 포스트 프로덕션, 그레파이트 온 핑크, 2016, 27p
여기에 대해 우리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부리오의 이러한 포스트 프로덕션-디제잉- 전략이 결국 예술의 자기 해체로 이어질 수 있지는 않은가? 이것은 광주정신이 지워진 광주비엔날레는 과연 여전히 광주비엔날레인가, 민주화 정신의 예술적 물신화를 피하기 위한 부리오의 리믹스(Remix)는 과연, 말하자면 매들린 아기가 흘린 눈물의 코어를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것과 같은 질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부리오의 큐레이팅은 더 이상 서사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의 감각적 가공물만을 소비하게 만드는 리듬의 장치가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무엇이 소실되었는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단순히 광주 비엔날레의 서사에만 머무르지 않고, 부리오가 스스로 포스트 프로덕션의 시대라고 진단한 동시대 미술 전반이 사고해야할 긴급하고도 무거운 질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 . 디제잉 이후의 관계를 상상하기
DJ라운드 럭셔리가 매들린 아기의 눈물을 샘플링했을 때, 그것은 곧 사운드가 되었고 리듬이 되었다. 그러나 그 감정의 서사와 진심은 흐려졌다. 부리오가 광주비엔날레를 리믹스했을 때도 우리는 분명 새로운 감각을 경험했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 전시는 누구의 리듬으로 울렸고, 누구의 목소리가 지워졌는가?”
우리는 이제 리믹스 이후를 상상해야 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는 포스트미디엄 이론을 개진하며-거칠게 말하자면-오염되어 버린 매체(medium)'개념을 새롭게 발견하고 다시 배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해체와 재조립의 반복이 아니라, 예술을 다시 작동하게 만드는 ‘시스템의 새로운 발견과 재구성’이다.
그 맥락에서, 광주비엔날레는 ‘판소리’를 단순히 감각의 샘플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광주정신.기억, 연대, 저항, 그리고 목소리의 울림.을 다시 작동하는 구조로서 호출해야 한다. 5·18의 민주화 정신은 어떤 신성한 기념물로 남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에 작동 가능한 시스템의 안에서 민주화 정신이라는 코어를 잃지 않은채-매들린 아기의 눈물 속에 담긴 비판적 맥락을 잃지 않은채-예술 속에서, 사회 속에서 재생 가능해야 할 것이다.
- 박제언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 박사과정. 2011 아트센터나비 연구원,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사비나미술관, 플랫폼엘아트센터 선임 큐레이터 학예팀장 역임. AR, VR, AI, 로보틱스 등의 기술을 접목한 다원 예술 프로젝트 및 연구 진행. 한국여성미디어아티스트 기획전 《나의 이야기를 들어줘》(2019, 호림아트센터), 뉴미디어와 현대무용을 결합시킨미디어 퍼포먼스(2019, ZER01NE), 《Break infinity Build》(2021, 메타버스 퍼포먼스)등 기획. 네덜란드 국제교류전시 《잘 알아듣지 못했어요 다시한번 말씀해주세요》(2022, DDP)를 기획 총괄. 다원 예술 그룹 도타비(dotavi), 미디어 문화연구 모임 ‘부업(VUUP)’의 공동설립자, '부업'과 2024 《Helf your self》(2024) 공동기획. 『체인 메이커 Chain Makers:블록체인, NFT, 예술 그리고 커뮤니티』(2023) 공저. 뉴미디어 솔루션기업 PUBLE 공동대표.
ㅡㅡㅡㅡㅡ
1) 해당 장의 작품분석은 위에 장에 인용한 비평가 강수미의 글에서 나타나는 통찰에 빚지고 있다. 다만 본고에서는 이러한 분석의 틀을 확장하여 부리오의 디제잉 전략이 리듬을 통해 어떤 맥락을 희생시키는지에 대해 질문하고자한다. 즉, 이 원고 역시 리믹스이자 디제잉이되, 채집된 원본의 코어-메들린의 눈물 이자 광주의 정신 또는 예술작품의 아우라-의 맥락을 잃지않고 콜라주 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Fig.1 매들린 아기(Medline Argy)를 믹싱(Mixing)한 라우드 럭셔리(Loud Luxury)의 공연장면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