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서점가를 돌며 미술서적을 찾고 그림 한 장 때문에 잡지 한권은 살 수 없다며 낱장으로 뜯어 팔라고 사정하고, 일간지 미술기사를 스크랩하며… 미친 녀석이 되어 버렸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열정과 광기만이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다. 조선 시대 이덕무는 책에 미쳤고, 바다 생물에 미친 정약전은 『현산어보』를 남기지 않았던가. 21세기 한국의 김달진(52)은 미술자료에 미쳐 있다. 그의 이름 앞에는 늘 ‘미술자료 인간 컴퓨터’, ‘걸어 다니는 미술사전’, ‘걸어 다니는 아카이브’와 같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이미 미술자료 수집만 35년의 세월을 헤아린다.
1972년 고등학교 시절, 홍익대 이경성 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가 그동안 수집한 온갖 미술자료를 보여주었던 일화는 이미 세간에 잘 알려진 전설이다. 그 인연은 1981년에 이경성 선생이 민간인으로선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맺어진다. 미술 자료의 체계적 수집이 매우 중요함을 알고 있는 이경성 선생이 그해 9월, 자료수집 담당으로 그를 채용했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이 그나마 현 수준에 이른 것은 그의 15년간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 아닐까.
그는 자료 수집에만 그치지 않고 미술자료에 관한 비판과 제안의 글을 발표했다. 「관람객은 속고 있다-미술자료 기록의 허구」(1985. 선미술), 「해도 너무한다, 누가 역사를 그르치는가」(1997. 가나아트), 「홀대받는 ‘미술관 사서’」(2002. 동아일보) 등의 글에서 자료의 허구뿐만 아니라 기록이 갖는 역사성과 의미를 지적하고, 나아가 기록의 수집과 정리와 연구를 위한 ‘미술관 사서’의 중요성을 피력하기도 했다. 또한 1991년부터는 꾸준히 미술자료 아카이브를 위한 ‘미술자료센터’의 설립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미술 자료가 단순 자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보 문화재’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1996년 가나아트센터 자료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가나아트닷컴 총괄팀장을 거쳐 2001년 ‘김달진미술연구소’를 개소했다. 이때부터 그는 미술 자료 수집의 실제적 효용성을 궁리했는데, 그 결과물로 월간 『서울아트가이드』를 창간했는가 하면, 달진닷컴(daljin.com)이라는 미술정보 사이트를 오픈했다. 매월 초, 전국의 주요 갤러리에서 무료로 받아 볼 수 있는 『서울아트가이드』 잡지는 훌륭한 전시정보 가이드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한 미술자료 콘텐츠가 되고 있다. 하루 평균 2천여 명이 찾는 달진닷컴 또한 온갖 자료로 가득하다. 한 예로, 미술잡지 7종 821권 13,824건, 폐간 미술잡지 15종 195권 3861건, 학회지 24종 166권 1405건에 대한 색인자료를 확인할 수 있고, 매일 일간지 15종에서 스크랩한 미술기사를 그날 살필 수도 있다. 만약, 연구소를 직접 방문한다면 전국에서 수집되고 있는 문화예술지 40여 종의 미술자료도 볼 수 있다. 또한 매월 발행되는 미술 관련 단행본에 대한 리뷰와 소개, 그리고 미술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미술인의 주소와 연락처도 구할 수 있다. 개소 후 작년 10월 이전한 연구소에는 안휘준, 김영나, 김영순, 윤범모, 윤우학, 박래경 씨 등 많은 미술계 주요 인사들이 다녀갔다.
소설가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는 제주도에 귀양 온 김윤식이 쓴 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를 사료로 삼았다. 이렇듯 하나의 자료는 역사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작은 팸플릿 하나에서 시작된 미술 자료 수집이 이제 한국 현대미술사 연구의 깊은 토대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지금 각 자료에 대한 도서관식 라벨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다. 우선 일차적으로 2600여 권에 이르는 미술 단행본을 내년 초에 회원제로 공개할 예정이다. 이 작업의 성과를 보면서 화집류, 팸플릿, 논문집, 잡지, 학술지 등으로 확대할 생각이다. 특히 연구자들에겐 매우 희귀한 자료가 될 근대작가 스크랩북도 정리 중이다. 근대작가 스크랩북이란 작가 개인별 파일을 별도로 만들어 신문기사에 난 화보, 논문, 잡지류 등 다양한 자료를 망라해 묶은 것이다. 이렇게 정리한 것이 260명에 이른다. 그 외에도 미술인명사전, 작고작가 리스트 등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작업들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자료가 널리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늘 주장했듯이 ‘미술자료센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수집한 자료의 보존과 관리, 연구, 자료공개 서비스를 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그래서 접근성이 떨어지고 장소도 협소한 현재의 연구소를 서울 가회동으로 옮길 구상도 하고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과 자본이 필요할 터이다. 그는 『서울아트가이드』를 통한 경제적 자생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와 연구소 직원 3명이 쌓아가는 한국 현대미술자료의 수집과 정리. 그러나 이것은 21세기 문화강국을 표방하는 한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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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의 벽 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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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美術』 창간호, 3호(문화교육출판사, 1956년 9월)
본격적인 미술잡지 시대를 연 잡지이다. 화가 도상봉 선생이 권두언 형식으로 쓴 창간사는 “해방 이후 신문화운동에 의하여 미술문화도 점차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으나 6·25동란과 더불어 인쇄 사정의 부진과 자재난으로 미술문화 발전상 막대한 지장이 있어…”로 시작된다. 특히 창간호 차례 페이지에 실려 있는 다비드 헤어의 철제 조각상 <창변의 모습>은 한국 철조각사의 중요한 자료인데, 이러한 자료의 소개로 철조각이 확산되기 때문이다. 3호는 대한민국미술전란회(이하 국전) 특집호로 구성되었다. 국전은 1회~5회까지 팸플릿을 제작하지 않았는데, 『新美術』이 당시 수상작을 특집호로 꾸민 것이다. 그리고 이 잡지의 발행인이 ‘이규성’으로 되어 있으나 본명은 ‘이항성’으로 판화가이며 후에 파리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58년 10월 제11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폐간 후에도 이 출판사는 『미술평론』과 『미술과 대학입시문제』를 발행하기도 했다.
02, 03
『現代美術』 창간호(현대미술사, 1974년)
당시 명동화랑 김문호 사장이 발행한 1970년대 전문 미술잡지이다. 그러나 이 잡지는 1964년의『美術』지처럼 창간호가 폐간호가 되었다. 이일, 이우환, 이세득, 이경성, 조요한, 김방옥, 정병관, 김인환, 오광수 등이 주요 필자로 참여하고있어 비평의 전문성을 살린 잡지였음을 알 수 있다. 특별기고로 파리에서 막 귀국한 정병관이 「상상미술관을 통해 본 앙드레 마르로의 예술관」을 발표한 글이 주목을 끈다. 또한 특집으로꾸민 「한국 작가들의 해외전」은 중요한 미술사 연구자료이다.
『한국미술』 창간호(한국미술협회, 1975년)
서세옥 선생이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재직시 발행한잡지이다. 「한국미술의 좌표」란 특집을 통해 “이렇게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좌담회를 싣고 있는데, 서세옥, 류경채, 박서보, 심문섭(사회), 하인두 등이 논의를 펼치고 있다. 2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04
9월 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위대한 세기-피카소>전을 개최하고 있는데, 다른 작가들에 비해 피카소는 한국인에게 인기가 높은 편이다. 이미 1950년대에 그에 관한 책들이 국내에 소개되었고, 전시 티켓에서 볼 수 있듯이 몇 년 마다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로댕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티켓을 자세히 살피면, 과거엔 복사본 작품을 전시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로댕갤러리도 있고, 2003년에 대규모 전시가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다.
05
『미술평론』 창간호(문화교육출판사, 1977년 3월)
1977년 11월 22일 청계천에서 150원을 주고 구입한 책이다. 이경성의 「한국 아카데미의 정착-선전에서 국전까지」가 실려 있긴 하나 교양지에 가깝다.
06
김달진 소장이 오래 동안 수집한 자료로 정리한 근대작가 스크랩북이다. 신문, 잡지, 논문, 화보 등 다양한 자료를 개별 작가별로 정리했다. 연구자에겐 더 없이 귀중한 자료로 활용 될 수 있을 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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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숙, 『근세문화사』(한성도서주식회사, 1963년)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 문화사를 소개한 책이다.09매일 15종의 일간지에서 스크랩한 미술관련 기사들을 파일로 정리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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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켓자료도 훌륭한 기록물로서 가치가 있다. 김달진 소장의 미술자료 수집은 우리가 자칫 소홀하기 쉬운 자료까지도 망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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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15종의 일간지에서 스크랩한 미술관련 기사들을 파일로 정리해 두었다.
10, 11
이경성, 『한국미술사』(문화교육출판사, 1962년)
1980년대 초, 청계천에서 70원에 구입한 책이다. 해방 후, 미술평론가 1세대를 형성하며 전문적 평론 활동을 펼쳤던이경성의 이 책은 삼국 이전의 미술과 삼국 시대 미술, 통일신라, 고려, 조선, 근대를 거치는 한국미술사의 전반적 구상을 정리했다.
Sam Hunter, 『Modern French Painting』(1956년)
이 책은 마네에서 피카소까지 다섯 명의 작가를 다루고 있다. 이화여대 류희영 교수로부터 전해 받았는데, 이 책을 통해 외국의 저작물이 직수입으로 들어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하게 된다.
12,13
『美術』 창간호(문화교육출판사, 1964년 5월)
“우리는 여기에 써둔다. 풍토는 메말라도 예술은 가난할 수가 없다”라는 말로 끝나는 창간사가 인상적이다. 근대미술연구가인 이구열 선생이 편집을 담당했다. 「포프?아트란 무엇인가?」라는 글이 실려 있어 당시 서구에서 일기 시작한 팝아트가 국내에 소개되는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한국 근대화단의 개척자① : 고희동」과 「한국 최초의 미술지?서화협회회보」에 대한 기사도 눈에 띈다. 그러나 아쉽게도 창간호가 곧 폐간호가 되었다.
『현대예술』(현대예술사, 1977년)
미술전문지는 아니며 일반 문화예술 종합지 성격의 책이다.
14, 15, 16
『미술춘추』 창간호(한국화랑협회, 1979년 4월)
협회 회보로 격월간 발행되었으나 현재는 중단된 상태이다. 일랑 이종상의 「노장의 예술관으로 본 여백」이란 논문이 주요기사로 실려 있다.
이경성, 『미술입문』(문화교육출판사, 1961년)
1978년 10월 8일 500원에 구입한 책이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발표한 평문을 수록한 이 책은 한국 미술비평사 연구뿐만 아니라 당시의 한국 미술계를 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평론집이다. 『미술입문』라 명명하긴 했으나 전환기의 한국 현대미술을 살필 수 있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채의순, 『문화사개요』(고려출판사, 1956년)
유라시아 고대 문명사를 통한 인류 문명사를 소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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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라벨 작업을 한 단행본들이다. 올 연말까지 라벨작업과 입력을 마치고 내년부터 회원제로 공개할 예정이다.
전국에서 수집하고 있는 40여종의 예술잡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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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造型藝術』 창간호(조선조형예술동맹, 1946년)해방 후 최초의 잡지이다. 4·6배판 16쪽 분량으로 발행된 이 책은 정가 10원에 판매되었다. 윤희순, 이쾌대, 조규봉, 정현웅 등이 필자로 참여하고 있는데 대부분 월북 작가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8·15 이후의 미술계의 정세보고」와 같은 글이 실려 있어 해방 직후의 미술계 풍경을 읽을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 기전문화예술 2006, 9ㆍ10월
- 글 김종길 | 사진 김민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