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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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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 숨은 파수꾼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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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다스왕은 당나귀귀를 가져서 망신을 당한 것이 아니다. 원래 어리석어서 귀가 그렇게 됐으나 이발사에게 보인 것은 더 어리석었다. 가족에게 이발기술을 배우게 하거나 머리를 상투처럼 틀어올렸어야 했다. 그런 식으로 당나귀귀나 노새귀를 감추고 평생을 감쪽같이 살다 간 사람이 얼마일까.


잠시나마 실없는 생각을 굴린 것은 한국미술계가 「당나귀귀」라고 계속 소문을 퍼뜨리는 金達鎭(김달진.45.가나미술연구소 자료실장)을 마주 하고서다. 이 「움직이는 미술자료실」은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예술의 전당 등의 잘못 된 기록을 꼬집어 냄으로써 공공문화기관의 「권위」를 흔들고 있다.


우리 문화계에서 기록이 엉성한 부문이 미술계만인가. 미술기관들로써는 억울한 일이다.

『미술계에 원한이 있어서 그런건 아니었습니다. 미술계를 아끼다 보니 그 기록이 소중해서 그랬을 뿐이예요. 저 자신 현대미술관에서 잔뼈가 굵었고 아직도 제가 신세진 어른들이 많이 남아있거든요.』그러나 미술기관의 억울함은 남는다. 김달진은 타고난 미술인도 예술인도 아니기에 문화와는 먼 데서 살거나 문화계라도 공연예술 등 다른 동네를 들쑤실 수도 있었다.


55년 충복 옥천태생인 김달진은 타고난 수집광이었을 뿐이다. 우표건 상표건 닥치는대로 았으나 「자료」라는 말도 모른채였다.

『원래 성격이 내성적인데다 어려서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더 나만의 세계에 파묻히게 된 것 같아요. 대전 충남중에 다닐 때 우연히 여성지에 컬러인쇄로 실린 「세계의 명화」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버릇대로 스크랩을 하기 시작했으나 「미술인」이 될줄은 몰랐지요.』


이 때부터 수집대상을 미술에 집중 했다. 서울의 한영고시절에는 청계천 헌책방을 뒤져 한물간 주간지를 사서 사진을 오렸다. 휴지 같은 주간지값도 빠듯해 서점주인에게 사진페이지만 팔라고 사정도 했다. 그래서 스크랩북은 더 어수선해 졌으나 김달진의 머리는 정리 돼 갔다.

『그림이 보기 좋아 시작했으나 곧 그 내용이 궁금해 미술책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보자 한국미술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미술에 관심을 갖다 보니 작가들에대한 기록이 너무 빈약해 그 일을 직업 삼아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교를 졸업하자 화랑이나 잡지사들에 편지를 보내 그런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결과는 무응답이었고 어느 잡지사 편집장이 『뜻은 좋으나 직업으로 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한 것이 유일한 답장이었다.

군을 제대한 뒤인 78년 동대문도서관에서 월간「전시계」를 보자 또 편지를 보냈더니 崔學天(최학천.75.도예작가)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전시계」는 미술잡지도 예술잡지도 아닌 생활정보지였다. 따라서 미술전시지면은 보잘것 없었으나 김달진의 「웅지」를 펴기에는 충분했다.


헌책방 대신 화랑들을 돌아다니며 온갖 전시소식을 실었다. 열성이 지나쳐 화를 부르기도 했다.

『「전시계」는 대부분의 전시행사를 전시명칭,날자,장소 등만 소개했어요. 그것이 너무 답답해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자 반응이 좋더군요. 욕심이 나서 주관적인 평가까지 끼워넣자 말썽도 났습니다.』


어느 한국화가의 팸플릿에 실린 독수리 그림이 너무 치졸해 보여 『독수리를 그렸는지 병아리를 그렸는지 모르겠다』고 썼다. 미니 월간지의 「사환급 기자」가 갑자기 미술평론가가 된 것이다. 출세가 너무 빨라 한동안 어지럼병에 시달렸다. 길길이 날뛰는 작가를 온 잡지사가 나서 달래야 했다.


그런 생활도 오래 가지 못했다. 80년 군사정권이 언론계에 회오리를 일으켰고 그 앞에서 이 잡지는 가랑잎 신세였다.

『잡지사가 문을 닫자 사장님은 도예작가의 길로 나섰고 저는 청주서 레스트랑을 하는 누나의 일을 거들고 있었어요. 그 해 8월 李慶成(이경성) 홍익대 박물관장이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임명됐다는 신문기사가 나서 반가웠습니다.』


이경성과는 「안면」이 있었다. 「전시계」시절 김달진은 홍대로 그를 찾아가 큰절을 올리고 자신의 스크랩북 열다섯권을 보인 적이 있다. 이경성은 기회를 보자고 격려했었다. 스크랩자료는 쓰레기일 뿐이었으나 그것을 열심히 「분리수거」한 젊은이는 쓸모가 있다고 보았으리라.


김달진이 청소부라도 좋으니 현대미술관에서 일하고 싶다고 편지를 보내자 답장이 와 81년 9월 덕수궁에 들어갔다. 일당 4천5백원의 임시직이었다. 그런 직급과 상관없이 김달진은 미술계의 「명사」가 됐다. 매주 금요일이면 쇼핑백을 메고 화랑은 물론 신문사 문화부에 모습을 비치는 수줍고 조용한 얼굴.


당시 미술계가 보는 김달진은 그런 정도였다. 화랑들은 김달진이 전시팸플릿을 얻어 문을 나서는 순간 자기네 전시를 OX로 품평한다는 것은 몰랐다.

『많은 팸플릿이 엉터리였어요. 전시 되지도 않는 작품이 실리기도 했고 어떤 작품은 같은 기간에 열리는 두 전시회의 팸플릿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

그것은 시작이었다. 미술계를 안에서 들여다 보자 미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뜻의 「美術」(미술)인지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는 뜻의 「迷術」(미술)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턱없이 높은 호당가격의 마술이 그렇고 예술성보다 「사교성」으로 곧잘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 풍토도 그랬다.


김달진은 85년 우리 미술계의 이런 迷術풍토를 고발하는 글 「관람객은 속고 있다」를 계간미술지「選」(선)에 실었다.

『당시 유홍준 선생님이 「선」의 주간으로 계셨는데 저더러 글을 쓰라고 권했어요. 「전시계」시절의 필화사건에 데어 사양했으나 선생님의 격려로 썼더니 너무 반향이 좋았습니다.』


김달진은 팸플렛이나 얻어 가는 심부름꾼에서 우리 미술의 감시하는 파수꾼이자 「미술계 비평가」가 된 것이다. 그것은 자료모으기의 위력이기도 하다. 자료는 색맹검사표의 색점 같은 것. 낱으로는 보잘 것 없어도 모이면 하나의 목소리나 그림이 된다.


李鍾國(이종국)의 「친일문학론」이 그렇다. 유명인사들이 일제하에서 쓴 친일의 글들을 아논 이 책에 별다른 「자료」는 없다. 불과 이삼십년 전에 활자를 탔으니 놀라운 구석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이것들을 한데 묶어 놓자 그것은 하나의 합창이 됐다. 제목은 「한국은 해방 되지 않았다」.


광복절이나 삼일절 기념식에서 연단의 높은 자리를 친일했던 「지도층」들이 차지하고 이들의 선창으로 만세삼창을 하고 있었으니 「한국은 대형 희극무대」라고 들어도 무방했다.


89년 한 일간지는 「젊은 문화주역」이라는 기획에서 그를 소개함으로써 김달진은 「걸어다니는 미술자료실」로써 성가를 굳혔다.

『그런 여건의 변화에다 공무원으로써의 필요성도 있어 다시 대학의 문을 두드려 보았으나 너무 어려웠어요. 미술계에서 나름대로 얻은 이름도 학력고사에는 아무 쓸모 없었습니다.』


김달진은 87년 서울산업대 금속공예과를 지원했다. 물론 금속공예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학력고사를 피해 「미술」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학과여서였다. 개방대학인 이 대학은 학력고사대신 영어와 미술실기(데생)시험만 있었다. 그것도 2년이나 낙방했다. 영어도 어려웠으나 미술실기는 더 어려웠다. 그림을 보는 눈은 세련 됐으나 손은 비협조적이었다. 삼수끝에 들어간 것이 다행이었다.


그런 김달진은 불과 몇년 뒤인 96년 수원대에서 강의를 했고 99년에는 중앙대 예술대학원을 졸업했다. 석사자격보다 값진 것은 「국내 미술자료실태와 관리개선 방안연구」라는 학위논문이었다. 제목은 흔한 것이나 이 논문은 학위를 위한 요식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체험이 배어있는 것이었다.


김달진은 학위를 땄으나 공무원으로써의 신분격상과는 타이밍이 맞지 않아 현대미술관을 그만 두게 된다.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말단공무원을 탈피할 수 없었다.

『96년 현대미술관을 그만 두고 가나미술연구소의 자료실장겸 가나아트기자고 옮겨 갔지요. 현대미술관의 자료실을 떠날 때의 심경은 새삼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김달진은 현대미술관을 떠났을뿐 미술계를 떠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과제를 찾아 갔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가 곧 내놀 「한국 미술판의 현장」(가제)은 제목 그대로 우리의 「미술판」의 문제점들을 바둑판처럼 보여주고 있다.「공모전은 필요악인가」 「미술상 50여개의 실상」 「미술단체 650여개의 실태」...

<글 양평 문화전문기자 / 사진 최요한기자>

- 세계일보 1999.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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