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희경 기자 사진 송하규 기자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늘 진부하게 들린다. 그리고'사랑'이라는 단어
는 때때로 참 촌스럽다. 그래서인지 사랑에 관한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
이 빛도 발하지 못한 채 물처럼 강처럼 비처럼 흘러가 버린다. 이번 달은 그
진부하고 촌스런 '사랑'이야기다. 그러나 이 사랑 이야기 이면에 담겨진 자
잘한 이야기들은 오히려 진솔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참 깊다.
이번 달 아름다운 만남에서는 이경성미술평론가,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83세 관장과 김달진미술자료 전문가, 47세을 만난다. 무엇이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답고 깊은 사랑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수집광과 박물관 관장의 첫 만남
이경성과 김달진은 1977년에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이경성은 홍익대학교 박
물관 관장을 하고 있었고, 김달진은 스물 한살의 젊은 청년이었다. 어려서부
터 뭐든지 모으기 좋아하는 수집광이었던 김달진은 우표, 깡통 등 관심이 가
고 좋아하는 것이라면 모두 수집했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주부생활』
과 『여원』잡지에 실린 명화 한 장씩을 뜯어서 모으기 시작했단다. 고등학
교를 졸업할 무렵이었을까. 경복궁에서 열렸던 「한국근대미술 60년전」도록
은 김달진으로 하여금 전시 도록 수집광으로 만들었던 첫 도록이었다. 그 때
부터 달진이(이관장은 김달진을 달진이, 우리 달진이 하며 부른다.)는 '미술'
과 관계된 자료라면 구겨진 종이쪽지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모으고 또
모았다.
김달진은 미술 자료 모으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단다. 그래서 일간지와
월간지 기자들, 각급 박물관 관장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
나 아무에게도 연락이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이경성만이 "홍대 박물관으로
한 번 오라."했을 뿐. 뛸 듯이 기뻤던 그는 그 길로 모아둔 미술관련 기사와
자료가 담긴 스크랩북 열 다섯 권을 한아름 안고 이경성을 찾아갔다.
"아, 글쎄 어떤 쬐그만 녀석이 내 방으로 들어오더니 땅바닥에 엎드려 넙죽
절부터 하더라구. 허허"
81년, 이경성이 초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에 오르자 그는 다시 한번 편지를
보냈다. 이관장은 달진이의 '미술사랑'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국
립현대미술관 자료실 임시직으로 특채했다.
미술관 병원
인사동 가까이에 있는 가회동 한국 병원에 갔다. 이경성 관장(그는 전前 국
립현대 미술관 관장이다. 그러나 김달진은 늘 그를 관장님, 관장님하고 부른
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도 관장님이라고 불러주길 바란다.)은 지난 2월
부터 건강을 생각해 이 병원에 아예 입주(?)해 살고 있었다. 출입구를 지나
2층으로 올라가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 코로 들어오는 이 냄새
는 분명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인데, 내 눈에 들어오는 건 병원의 하얀 벽
이 아니라, 복도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14 점의 그림이었다.
마치 그 그림들이 내가 가야할 곳을 일러주는 이정표처럼 느껴졌다. 그림들
을 따라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그랬더니 정말로 이경성 관장의 방이 나왔다.
나란히 붙어 있는 두 평 남짓한 1인 실 병동 두 칸, 208호와 206호가 그의
살림방이자 작업실이다. 그런데 이 관장은 이 방을 208호, 206호라고 부르지
않는다. 손바닥만한 종이에 손수 그림을 그려 넣고 거기에 ①이라고 써서 문
에 붙여 놓았다. 그 옆방에는 ②라고 써서 붙여 놓은 것이 보였다. ①이라고
이름 붙여진 방에는 추사 김정희의 '詩境'이란 탁본, 프랑스 화가 클로드 비
알라가 선물한 그림과 이 관장의 그림들이 함께 걸려 있다. ②번 방에는 요
즘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들, 도자기가 있었다. 두 개의 방은 병실도 살림방
도 아닌, 작은 미술관 같았다.
처음에는 방을 잘못 찾을 줄 알았다. 책상 위에 놓여진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CD때문이었다. '어! 저건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수의 CD인데…' 놀라는
내 표정을 이미 읽었는지 이 관장은 "너무 놀라지 마요. 미국 사는 우리 손
녀딸이 준 CD예요. 좀 전까지도 듣고 있었지. 허허"하며 안심시켰지만 실은
좀 전까지 듣고 있었다는 말에 더 놀랐다.
어느 자료전문가의 회상
이경성 관장과 김달진과 함께 병원을 나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가고
있었다. 차 속에서 김달진은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그에게는 두 분의 아버
지가 있다 했다. 한 분은 이미 돌아가신 그의 생부 김기석씨. 그리고 또 한
분의 아버지, 이경성 관장. 김달진에게 두 분의 아버지가 있으니, 부인최현
희 42세에게는 시아버지가 두 분이 있는 셈이겠구나 싶었다.
"매주 목요일이면 안 사람은 병원에 들러 청소하고 세탁물을 가지고 집으로
옵니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면 부부가 병원에 들러 관장님과 저녁을 함께 하
죠. 일주일에 서너 번쯤은 출근길에 찾아뵙곤 합니다. 곤하게 아침 늦게까지
주무시고 계실 때는 계속 관장님 옆에 있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듭니다."
요즘은 출근길에 관장님을 뵐 때마다 옛날 생각이 나곤 한다 했다.
"생각해보면 정말 큰 은혜를 입었지요. 제가 미술을 계속 좋아할 수 있도록,
자료를 수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이니까요. 중대 대학원을 마친 것도 관
장님이 이사장으로 있는 석남미술재단 덕이었습니다. 아침마다 병실에서 관
장님을 뵈면, 내가 은혜를 입었던 만큼은 잘해드려야 할텐데, 정말 잘해드려
야 할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
국립현대미술관에 도착했을 때 이 관장은 친정집에 온 것 같다 했다. 화요일
이었다. 평일이었는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술관
안에서 작품을 보는 어린이들부터 조각작품 옆에서 사진을 찍는 어느 대학교
졸업생들, 벤치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노부부…
그들을 보고 있는 이 관장의 얼굴을 슬쩍 엿보았다. 과천에 땅을 마련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장애인 관람객을 위한 경사로를 만드는 일까지, 이 미술관
에 애정을 온통 쏟아 부었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자랑스러움
과 씁쓸함이 교차하고 있었다. 지난 해 교통사고로 다리가 불편한 그는 휠체
어로 이동하고 있었다. 미술관 입구까지 계단을 사용할 수 없어, 장애인을
위해 만들어진 경사로로 휠체어를 타고 갔다.
"내가 설계해 놓고, 내가 사용하네. 허허."
그리고 국립현대 미술관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서 한 마디를 남겼다.
"우리나라에 그림 좀 그린다는 화가가 몇 천명이 있는데 말이야. 누가 남을
지 모르지…"
미술평론가다운 뼈있는 한 마디였다. 그래, 과연 어떤 작가가 우리 기억 속
에, 한국 미술사에, 그리고 세계 미술사에 남게 될까.
사랑의 방식
김달진의 별명은 '금요일의 사나이'다. 전시 도록을 담을 큰 가방을 하나 메
고 금요일마다 인사동에 나타나는 금요일의 사나이. 무거운 가방 때문에 기
울어졌던 사나이의 한 쪽 어깨가 요즘은 제자리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다
른 쪽 어깨에 메고 있는 또 하나의 가방 때문이었다. 이 관장의 저녁식사를
위해 아내가 정성스레 싸준 죽과 반찬, 그리고 과일이 담겨 있는 커다란 가방…
"요즘은 안사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관장님과의
인연은 저와 관장님, 두 사람 사이의 일이잖아요. 그런데 어떨 때 보면 안사
람이 저보다도 더 관장님을 위하는 것 같아요. 전 같으면 일주일에 한 두 번
쯤 출근길에 찾아뵙곤 했었는데, 요즘은 관장님께 이것 갖다 드려라, 저것
같다 드려라 하는 통에 거의 매일 병원으로 출근합니다."
이경성 관장과 김달진의 '러브스토리'를 들으면서 두 사람의 인생에 대해 천
천히 곱씹어 보았다. 그는 미술 평론가 제 1호였고, 국립현대 미술관 초대관
장이기도 했다. 이 관장이 나타나면 모든 것이 새로운 시작이었다. 오래된
것을 새것으로 변화시키고 없던 것을 창조해내는 그의 내적인 에너지, 동인
動因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사랑 같았다. 미술에 대한 사랑. 그것도 눈이 먼. 김달진도 꼭 그를 닮았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 미술과 미술자료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걸어다니는 꼭 그
만큼, 그가 사랑하는 꼭 그 만큼 자료가 모아지기 때문이다.
미술계에는 참으로 다양한 일을 사람들이 모여있다. 미술관장과 박물관장,
작가와 관객, 전시 기획자와 미술전문기자, 그리고 미술자료 전문가 등등.
미술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 두 사람만큼 미술에 눈이 먼 사랑을 한다면
미술문화가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상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방법이 아닌가 말이다. 어떻게 사랑하
는가 하는. 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가끔은 미술계에 따끔한 한마디를 던지는 김달진의 이성적인 사랑과 좋은 작품과 평론으로 관객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경성 관장의 감성적인 사랑. 두 종류의 적절한 사랑이 우리 미술계를 이 만큼 키워놓았구나 하는 생각이 왜 이제서야 드는 것일까.
오늘 두 사람의 만남도 한국 미술사의 한 장면으로 남을 것이 뻔하다. 이 소
중한 만남에 대한 자료를 직접 수집하기가 쑥스러울 것 같아 이렇게 대신 기
록해 두는 것이다.
석남 이경성石南 李慶成은 1919년 인천에서 출생했다. 와세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 미술사 연구과정에서 수학했다.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
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홍익대 박물관, 워커힐 미술관 등의 관장을 지냈다.
이화여대와 홍익대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1회 광주비엔날레 심사위원,
1984년 문화훈장, 1994년 세종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1981년부터 석남미술
상을 제정하여 시상해 오고 있으며, 현재는 가회동 한국병원에 마련한 작업
실에서 틈틈이 붓을 잡고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 미술세계 200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