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갈매기 조나단과 우리 아빠를 비교한다. 조나단이 친구들의 비웃음으로 고달팠던 것같이 우리 아빠도 미술자료를 수집하며 고달프다. 아빠와 나도 자존심 강하고 의지가 굳고 착하며 약간 바보 같은 똑똑이가 되어야 기쁘고 즐거운 생활을 할 것 같다."
미술자료연구가 김달진 님(47세)은 초등학생이던 딸아이가 쓴 이 글귀를 늘 가슴에 품고 있다. 미술자료 수집,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시작한 일이다. 돈이 되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인사동과 사간동 화랑가를 돌아다니며 전시회 팜플렛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으고, 미술에 관한 것이라면 한 줄의 신문기사라도 오려 두었다. 그러나 미술계의 반응은 차가웠다. 단순한 기능적인 일이라고 얕보는 사람도 있었다. 온갖 자료들로 가방이 불룩해져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파 오면 그는 불현듯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자기와의 고독한 싸움에 조금씩 지쳐 갈 즈음 우연히 아동잡지에 실린 딸아이의 글을 보고 그의 가슴속은 환해졌을 터이다.
25년 세월을 오로지 미술자료에만 매달려 온 김달진 님. 그는 이 분야의 개척자이다. 걸어다니는 미술 사전으로 통하는 그는 우리나라 현대미술사에 관한 어떤 질문에도 술술 대답한다. 어느 해에 어떤 전시회가 열렸는지를 비롯, 웬만한 작가의 출신학교, 작품 경향 등을 다 꿰고 있다. 전시회가 끝나고 나면 버려지는 팜플렛처럼 묻혀질 뻔한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사가 그의 손에 의해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모으는 걸 좋아했다. 우표와 화폐, 담뱃갑까지…. 중학교 때 여성지에서 르누아르와 다 빈치의 그림을 보고 미술 쪽으로 관심이 옮아갔다. 학교가 파하면 청계천 헌책방을 뒤지며 용돈을 털어 명화가 수록된 잡지를 샀다. 밤낮없이 신문을 오리는 이 수집광을 가족들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지만 그의 가슴속엔 조그만 꿈이 싹트고 있었다,
"어느 날 ' 아! 내가 하는 이 일을 계속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 소개를 글로 써서 등사판에 밀어 잡지사와 미술평론가들에게 보냈어요. 아무 대답이 없었지요. 딱 한 곳, 어느 잡지사 편집장이 답장을 했는데 그 일을 직업화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과의 만남도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무작정 그동안 스크랩한 자료들을 보자기에 싸 들고 홍익대 박물관장을 찾아갔다.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수집한 자료들을 훑어본 이경성 박물관장은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며 격려해 주었다. 누군가에게서 처음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그 인연으로 4년 뒤인 81년, 이경성 님이 현대미술관장으로 취임하면서 미술관 자료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고졸 학력으로 일당 4,500원의 임시직이었지만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이어 그의 작업을 통해 작가의 약력이나 연보, 연표 등에 많은 오류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의 이름은 알려지기 시작했다.
"제가 너무 편집광적인 건 아니냐고들 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바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제가 할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뒤 95년 그의 20년 노력은 《바로 보는 한국의 현대미술》이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겨 출간되었다. 500여 페이지에 걸쳐 작가, 평론가, 단체, 화랑, 전시회 등 우리나라 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이 책을 보고 미술계는 경하해 마땅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사실은 87년에 책을 내려 했어요. 그때 이경성 관장님이 호통을 치셨죠. 책은 무덤 속에 가져가는 것인데 아직 익지 않은 열매를 따려느냐 고요. 그 뒤 겸허하게 제 자신을 돌아보고 7년을 더 준비한 끝에 책을 냈지요."
미술을 사랑하여 만학으로 대학에 입학, 금속공예과를 졸업하고 또 대학원에서 문화예술을 전공하며 여러 잡지에 평론을 쓰기도 했지만 그는 미술자료 연구가 나의 몫이라고 잘라 말한다. 날마다 자정 무렵 집에 돌아가서도 일을 놓지 못하는 그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온통 미술에 관한 생각뿐.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지한 스스로를 반쪽 인생이라고 여긴다.
"오로지 하나에 푹 빠져 살았지요. 화랑가를 벗어난 길에서는 늘 헤맸고 모임에라도 나가려면 익숙하지 않아 여간 불편하지 않아요.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갔다가 중년이 된 친구들 가운데 내 집 마련을 못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돈이요? 내가 벌고 싶다고 해서 모을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마음을 열어 놓고 있으면 언젠가 돈이 모아지겠지 생각하며 살아요. 후회는 안 해요. 힘들지만 제가 선택한 일이어서 행복합니다."
"김달진 미술연구소", 2002년 새해 그는 한국 미술계 자료를 책임진다는 다부진 각오로 자신의 이름을 딴 연구소를 열었다. 우선 나라 안 168개 전시장의 전시 정보를 소개하는 무료 전시안내지 <서울 아트 가이드>를 석 달째 펴내고 있는데, 그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해야 할일이 책상에 쌓여 있는 자료만큼이나 많다.
"25년째 정리하고 있는 근대작가 인명록을 하루빨리 완성하고 싶습니다. 우리 미술계 발전의 바탕은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무명 작가들이에요. 그 흔적을 되살리는 중요한 작업입니다. 옥천 고향집, 연구실과 집에 발 디딜 틈 없이 쌓여 있는 자료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좀 급해지죠."
남들이 하찮게 여긴 일에서 꿈을 키우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은 김달진 님. 인터뷰가 끝나고 이튿날 한 통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가 책상에 붙여 놓고 눈길이 닿을 때마다 되새긴다는 글이었다. 꿈을 이루겠다면 발돋움하여 대담하게 뛰어오르세요. 하늘로 떠오를 즈음이면 날개가 돋아나고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 월간 <좋은 생각> 2002년 5월호
(글 / 김선경․사진 / 최연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