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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지 않을 미술작가, 잊을 수 없는 건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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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지 않을 미술작가, 잊을 수 없는 건물 <1>

조선일보 2008.01.15
이규현 기자 kyuh@chosun.com

'잊히지 않을 작가'를 추천한 전문가들 (모두 20명·가나다순)

강수미 미술평론가, 고충환 미술평론가, 김복기 월간 '아트인컬쳐' 편집장, 김상철 월간 '미술세계' 편집주간, 김선정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김영호 중앙대 미대 교수,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김태호 서울여대 미대 교수, 김홍희 경기도미술관장, 박영택 미술평론가, 오광수 미술평론가, 윤우학 미술평론가, 윤진섭 호남대 미대 교수, 이건수 '월간미술' 편집장, 이영철 계원조형예술대 교수, 이주헌 미술평론가, 이준 삼성미술관 리움 부관장, 전영백 홍익대 미대 교수, 정준모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최열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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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요즘처럼 폭발적인 때가 없었다. 미술시장은 기록적인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미술시장이 생산하는 정보만 부각되다 보니, 화랑과 경매회사가 아닌 비영리 조직·기구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하반기에 김달진 미술연구소와 함께 '(100년 후에도) 잊히지 않을 작가들', 그리고 '2008 미술품 전시의 베스트 건물'이라는 두 가지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100년 후에도) 잊히지 않을 작가들'을 묻는 설문조사(작년 12월 20~31일)에는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미대 교수 20명이 참여했다. 전문가들은 '국내외에서 활동을 하는 한국 생존작가 중 미래에도 잊히지 않고 기억될 작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3~5명씩 추천했다. 전문가들은 '미술사적인 가치' '국제적 인지도' '독창성' '작가정신' '조형미' 등이 추천 기준이라고 밝혔다.

최근 국내외 미술계에서는 이런 설문조사를 다양하게 하고 있다. 세계적 미술월간지 '아트뉴스'는 작년 11월호에서 창간 105년을 맞아 '105년 후에도 기억될 작가'를 설문 조사 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국내 한 미술잡지도 매년 설문조사를 통해 한국미술계의 파워인물을 조사해 발표한다.

'2008 미술품 전시의 베스트 건물'을 묻는 설문은 작년 9~12월에 걸쳐 실시됐으며 평론가, 큐레이터, 교수들뿐 아니라 화랑운영자, 컬렉터 등도 포함해 미술관계자 60명이 참여했다. 그들은 기업사옥, 호텔, 은행, 병원 등 일반인에게 공개된 건물 중 미술컬렉션이 좋은 건물을 추천했다. 두 가지 설문 조사를 통해 복수로 추천된 작가와 건물들을 몇 차례에 나눠 무작위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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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원형질'이란 독자적 조형 언어로 현대미술 방향 제시

한 미술작가가 미래에도 남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그가 현재 우리 미술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박서보(77)가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로 볼 때 그의 예술세계가 먼 미래에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박서보는 50년대 후반 한국현대미술이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시대로 도약하는 전환적 시점에 등단해 미술계에 자신의 존재를 굳건히 세웠다.


▲ 박서보의‘묘법 No.16-78-81’(130×162cm·1981년작).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 한국미술은 '뜨거운 추상미술의 전개'라는 혼란기에 처 해있었다. 이 때 박서보는 '원형질'이라는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구현함으로써 미술사의 전개에서 누구보다도 앞서 갈 수 있었다. 박서보는 자신의 개별 작업과 우리미술의 진로가 어떻게 연관 되느냐를 끊임없이 진단하고 자기검증을 해, 개인으로서의 발전과 동시에 전체의 성숙에 영향을 끼치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70년대에 들어와 시도된 '묘법' 시리즈는 그의 중년기 성숙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것은 개별의 성과이면서 동시에 우리 미술의 동질성과 정체성 추구라는 공동의 성과를 이룬 것이었다. 박서보가 이끈 단색파 또는 백색파는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최초의 에콜(유파)이랄 수 있다. 그의 후반기는 '묘법'의 새로운 변주를 통해 또 한 번 자기 성숙을 도모한 것으로 평가된다.

오광수·미술평론가,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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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

현대인의 삶과 밀접한 철학적 주제를
일상 오브제 속에 담아내 남다른 깊이 인정받아

설문에 참여한 전문가들이 '잊히지 않을 작가'로 김수자 (51)를 꼽은 이유 중엔 "국제 주류미술계에서 인정 받았다"는 게 가장 많았다. 홍익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0년대부터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국내보다 외국에서 더 인정을 받았다. 1990년대 이후 뉴욕 P.S.1/MOMA 미술관, 비엔나 쿤스트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 등 세계의 권위 있는 전시에서 수없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2005년에는 뉴욕 타임스스퀘어 빌딩 전광판에서 그의 대표적 비디오 작품들이 3개월 동안 상영되기도 했다.

김수자는 이미 존재하는 '오브제'로 설치, 사진, 비디오, 퍼포먼스를 한다. "아티스트가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게 아티스트의 역할이라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20 세기 초반 마르셀 뒤샹이 와인랙과 남성 소변기를 들고 '레디메이드(ready-made) 예술'을 시작한 이후 많은 현대미술가들이 새롭게 뭔가 만드는 것을 포기하고 이미 존재하는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으로 작품을 해왔다. 김수자는 특히 '명상(meditation)', '떠도는 삶(nomadic life)'처럼 현대인의 삶과 밀접한 철학적 주제를 보잘것없는 일상 오브제 속에 담아내 남다른 깊이를 인정 받았다.


▲ 김수자가 2006년 마드리드‘크리스탈 궁전’내부를 빛과 소리로 바꾸었던 설치작품‘호흡:거울여인’. /김수자 스튜디오 제공

김수자가 가장 즐기는 오브제는 한국 전통의 천을 이용한 '보따리'다. 꽁꽁 싸맨 보따리 속에, 파편화된 인간 삶의 무언(無言)의 요소들이 들어간다. 이런 보따리를 늘어 놓는 설치, 보따리를 트럭 가득 싣고 떠나는 퍼포먼스 등으로 처음 유명해졌기에 해외에서도 '보따리(Bottari) 작가'라 불린다. 나중에 비디오 작품을 하면서도 그는 '싼다(wrapping)'는 행위에 초점을 뒀다. 낯선 나라 낯선 사람들 속에 가만히 서 있는 자신, 흐르는 강물을 조용히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찍은 비디오 작품을 통해 그는 "실체가 있는 것들을 실체가 없는 방식으로 싼다는 점에서 나는 비디오 역시 보따리 그 자체로 본다"고 말했다.

추천자들은 "늘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점도 김수자를 꼽은 이유로 들었다. 2006년 스페인 마드리드 '크리스탈 궁전(Crystal Palace)' 내부를 빛과 음향으로 바꿔버린 설치작품 '호흡: 거울여인(To Breathe: A Mirror Woman)'은 그가 지금까지 했던 작업의 개념을 모두 넣으면서 외형은 완전히 새로웠던, '장소 특수적(Site-specific)' 작품으로 세계적인 호평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홈페이지(www.kimsooja.com )에서도 볼 수 있다.

이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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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미술의 역사' 이우환… 서구 모더니즘 극복한 예리한 화가
이우환… 점과 선, 그리고 여백의 묘미… 예술 에너지 충만

"점 하나 덩그러니 찍어 놓고… 참 어이없다."

이우환 작품 앞에서 누구나 한 번쯤 던질 법한 이런 질문에 어떤 명쾌한 대답을 내놓을 것인가? 이우환 예술은 전문가들조차도 쉽게 오를 수 없는 '큰 산'이다. 그 예술 세계의 '게놈'(genome)이 아주 복잡하다. 답이 잘 보이지 않는 미술작품. 역설이지만 이것이 이우환 예술의 매력이다. 그는 현재 국제적으로 작품성을 인정 받고 있는 몇 안 되는 한국 작가들 중 우뚝 서 있는 데다가, 동양 모더니즘 회화의 전개에 끼친 미술사적 업적은 두고두고 높이 평가될 것이다. 이우환을 '잊히지 않을 작가'로 꼽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우환은 동양과 서양을 떠돌며 살고 있는 세계인이다. 예술의 지향점과 그 성가(聲價) 또한 국제적이다. 이우환은 '우리'보다 '나'에 착목한다. 따라서 자신의 생물학적 배경인 한국이나 동양의 공동체 언어를 내세우길 싫어한다. 국제성을 위해 지역성을 팔지 않는다. 이우환은 말한다. "나와 타자가 시적으로 악수하는 것, 그것이 내 삶이고 예술의 지표다."

회화사의 정통파 이우환은 '그린다'는 회화 고유의 신체 행위를 존중하고 고수한다. 20세기 미술사의 혁신가들은 그리는 행위를 부정하는 일에 앞장섰다. 루치오 폰타나는 캔버스를 찢었고, 로버트 라이먼은 바탕을 하얗게 덮어버렸으며, 이브 클라인은 붓을 던지고 몸으로 물감을 칠했다. 이우환은 최소한의 표현 요소인 점과 선만으로 그린다. 또한 그리지 않는 여백을 둠으로써, 그림의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새로운 조형 원리를 좇고 있다. '그린 것'과 '그리지 않은 것'의 상호작용, '비어 있는 것'과 '차 있는 것'의 만남. 이우환의 회화는 절대적 존재성을 지니고 있는 장소다.

예술가란 문명의 한 토막을 생산하기 위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특히 현대미술 작품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이 빠지면 미술은 공허한 '유희'로 흐르기 쉽다. 이우환은 현대미술의 싸움터에서 명징한 자기 논리의 성(城)을 쌓아가는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탁월한 예술이론가이자 비평가다. 이우환이 그린 점과 선 하나하나는 깊은 통찰과 사유의 흔적이다. 점과 선에는 문·예·철(文·藝·哲)의 에너지가 세포처럼 작동하고 있다.

살아 있는 미술사(史) 이우환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에 걸쳐 일본 미술계를 석권한 '모노하(物派)'의 핵심인물로 활약했다. '모노하'란, 이우환이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설치작품을 했듯, 가공되지 않은 자연적 물질이나 물체를 그 자체로 사용해 예술언어로 삼았던 작가들을 가리킨다. 이우환은 또 70년대 한국 모더니즘의 단색화에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전통에 안주하지 않았고, 철학을 전공했지만 서양의 동시대 유행에 흔들리지 않았다. 동서양의 미적 기준의 한계를 모두 피해가면서 양자가 서로 만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왔다. 그의 작품에는 동아시아 회화의 본질을 재발견해낸 조형 방법과 정신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서구 모더니즘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예리한 비판력이 살아있다. 그래서 이른바 '이우환주의'는 창작과 비평 모두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복기·월간 '아트인컬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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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물질의 본성을 끌어내는 조각가

사물에는 저마다의 본성이 있다. 본성은 사물들 속에 숨겨져 있다. 본질은 기능적인 관점이나 자연과학적인 분석대상으로 삼아 뜯어보려는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무의식처럼 사물의 물질적인 성질 너머에 있으며, 그 무엇으로 명명되기 이전의 위상으로서 자리하며, 모든 선입견을 걷어낸 맨 의식에만 자기의 실체를 드러내 보여준다.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던 정현(52)의 조각은 바로 이런 사물의 본성을 발견하고 캐내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갇혀 있던 석탄 덩어리나 온갖 풍화를 견뎌낸 막돌을 가만히 응시하면 켜켜이 중첩된 시간의 지층(地層)과 세파가 만들어낸 상처가 보인다. 또 이 모든 것이 응축된 사람의 얼굴도 보인다. 작가 정현은 이 석탄 덩어리와 막돌을 선호한다. 작가의 뜻대로 잘 다듬어지지 않는 물질과의 게임을 즐기는 것이다. 석탄과 막돌 속에 내장된 비정형의 결들은 자기를 제어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무력하게 만든다. 이렇게 석탄 덩어리나 막돌을 깨 나가다 보면 작가 자신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결들이 나타나고, 그 결들이 얼기설기 모여 암시적인 얼굴의 형상이 드러나 보인다. 내면이 표면이 되고, 무의식이 의식의 층위로 밀어 올려진 것이다.

여기에 도로포장용 재료인 아스콘이나 침목을 소재로 한 조각은 또 다른 의미를 더한다. 사람들을 위해 길이 되어준 재료들이다. 작가는 이제 그 소임을 다해 버려진 이 재료들 속에서 마치 길바닥처럼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뿐인 보통사람들의 심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초상을 캐내어 보여준다. 이렇게 작가 정현은 전통적인 형상조각과 모더니즘의 물성조각 사이의 단절된 끈을 이어준다.

고충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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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명단에서 빠진 중견·원로 작가 많아 앞으로 조사 정례화

유명한 미술사학자 E.H. 곰브리치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에서 "글을 쓸 당시에 각광을 받아 기록된 작가들이 진정으로 '역사화'될지 아무도 예견할 수 없으며, 대체로 비평가들은 형편없는 예언자임이 증명되곤 했다"라고 썼습니다. 이번 설문에 참여했던 응답자 K씨는 곰브리치의 말을 인용하며 "지금 우리가 추천하는 작가들이 정말로 50년 뒤, 100년 뒤에도 기억될지, 아니면 잊혀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전제했습니다. 곰브리치가 저서에서 "이 책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던 유명한 작품과 작가의 수는 엄청나다"고 한 것처럼, 이 설문 결과에서도 누락된 중견작가·원로작가들의 이름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미술사적 평가는 별도의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다만 이번 설문조사의 참여자들은 '비영리 부문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전문가들'이 우리 미술작가들의 미래 가치를 가늠해보아야 하고, 그것은 시장의 뉴스가 비대한 요즘 같은 때에 필요한 작업이라는 점에 동의하였습니다.

미술전문가들이 어떤 작가를 미래의 작가로 생각하는지는 해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본지는 이 같은 작업을 정례화해서 우리 작가들의 미래 가치에 대한 조사결과와 그 변화를 통계적 자료로 축적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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