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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개척하며 스스로 자기 몫을 만들라

관리자

[CEO에게듣다] 김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관장
양지연 _ 동덕여대 큐레이터과 교수

인터넷 사이트 '달진닷컴'(www.daljin.com)을 만들 때였다. 초기 제작비가 큰데, 만드는게 맞는다, 사이트 이름은 무엇으로 해야 할지 등 여러 가지 갈등이 많았다. 결국 아트를 다루지만 아트가 들어가지 않은 사이트명이 되었는데, 그것이 매우 유효했던 것 같다.
나의 이미지와 사이트 이름이 맞물려 사업 모델이 된 셈이다. 결국 한 사람이 살아온 것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김달진 관장은 기록과 자료관리 문화가 척박한 한국 근현대 미술계에서 미술자료 수집이라는 외길을 걸어왔다. 어찌 보면 공적 시스템이 했어야 할 일을 개인이 담당해온 셈인데, 보람도 남다를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게 생각하는 일은?


중학교 때부터 미술자료를 수집했는데 당시에는 어떤 큰 비전을 품고 시작했던 건 아니다. 단순히 여성잡지나 화보에 실린 작품 사진이나 기사들을 모으는 재미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씩 발전하면서 그 다음 단계로 올라서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미술자료를 수집하는 사람은 많이 있겠지만, 사적인 취미나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이것을 사회적으로 공익화하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간 것이 다른 미술자료 수집가와 차별화 될 수 있었던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시절에 주변 어른들이 만날 신문, 잡지만 오려서 먹고 살 수 있겠느냐는 걱정을 많이 하셨고, 나도 이게 직업이 될 수 있을까 고민을 했었다. 그래서 당시 이경성 선생님, 이일 선생님, 오광수 선생님 등 미술문화계 인사들에게 내가 하는 일을 알리고 조언을 구하는 서신을 많이 보냈다. 대부분은 외면당했고, 당시 [뿌리깊은 나무]의 편집장으로부터 받은 유일한 회신에서도 자료수집이 직업으로 연결되기는 어려울 거라는 부정적인 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서양 명화만 모으다가 한국 근현대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경복궁 안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있었던 1972년에《한국근대미술60년展》이라는 큰 전시가 열렸다. 그 전시를 보면서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같은 분에 대한 자료는 찾기 쉬웠는데, 국전 심사위원을 했던 어떤 작가의 자료를 찾으려고 하니까 의외로 없었다. 그 당시에 국전이라면 대단히 중요한 행사였고, 거기에 심사위원까지 역임하셨던 분인데 관련 자료가 없다는 것을 알고,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주요 작가별로 스크랩북을 만들어 계속 자료를 모았다.

이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직장이 없을까 알아보다가, 월간 [전시계]라는 잡지를 알게 됐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8년부터 근무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경성 선생님이 홍익대 박물관 관장을 하실 때 여러 번 서신을 보내니까 한번 오라고 하셔서 홍익대학교로 가서 뵈었다. 워낙 존경하는 분 앞이라 떨리는 마음으로 큰 절을 하고, 보자기에 싸가지고 간 스크랩북을 보여드렸다. 보잘 것 없는 스크랩북이었겠지만, 정성이나 열성은 기억을 하셨던 것 같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뀌기도 하는데, 81년도에 이경성 선생님이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부임하시면서 일할 기회를 주셔서 임시직 공무원 일용직으로 일당 4천5백 원 받는 자료관리 업무를 시작했다.


“목표를 먼저 정하기보다 일을 하면서 조금씩 구체화 되는 과정”

그렇게 시작된 국립현대미술관 자료담당 업무와 이후 가나아트센터 자료실을 거쳐 2001년에는 독립해서 지금의 김달진미술연구소를 개소했다. 자료수집과 관리에 그치지 않고 정보화로 역할을 확장한 사업가이기도 한데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연구소의 CEO로서 사업 영역과 사업 모델을 설명해 달라.

살아오면서 어떤 목표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매진하는 성격이라기보다 일을 하면서 조금씩 늘려가는 방식으로 해왔던 것 같다. 가나아트센터에서 5년 8개월을 근무한 뒤 독립할 때 사업 모델로 생각했던 것이 무가 전시정보지인 [서울아트가이드]이다. 가나아트에서 근무할 때 잡지 [가나아트] 부록으로 [서울전시회가이드]를 통권 40호까지 만들었다. 이를 기초로 해서 지금의 [서울아트가이드]가 나온 셈이다. 이 일로 생활이 될 지 걱정도 많이 했고 의문도 많았는데 몇 년 흐르면서 자리가 잡혀갔다.

물 론,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광고비로 제작비를 충당할 수 없었고, 개인적인 갈등도 컸다.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있었고 나름대로 이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아 왔는데 영업을 해야 하니까. 영업은 다들 천하게 여기지 않나. 아는 작가에게 전화해서 내용을 설명하고 광고 좀 해달라고 얘기하는데 자존심도 상하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메이저 화랑에 찾아가도 주요 저널에 광고하려 하지 [서울아트가이드]에 광고하는 것을 꺼렸다. 3~4년이 지나 자리를 잡아가니까 메이저 화랑부터 광고를 싣기 시작했다. 발행 부수가 3만부로 증가하고, 거기에 실리면 광고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니 젊은 작가들도 팸플릿 1000부를 뿌리는 것보다 [서울아트가이드]가 더 효과적이라고 여기고 찾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점점 커나간 것이 하나의 사업모델이라면 사업모델이 되었다.

[서울아트가이드]는 일종의 틈새시장에 접근한 것이 먹힌 셈이다. 이를테면 작가들이 전시 홍보를 해야 하는데, 사실 신문에 기사화되는 것은 어렵고, [월간미술] 같은 유가 잡지에 광고를 하자니 광고비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형식면에서도 잡지의 별책 부록이 아닌 처음부터 정식으로 정기간행물로 등록했고, 전시장 위치를 구역별로 나누고 전시장별, 지역별로 구분한 기본 포맷을 정착시켰다.

그 다음에 아무래도 오프라인의 한계가 있으니까 몇 달 후 인터넷 사이트 ‘달진닷컴’ (www.daljin.com) 을 만들었다. 초기 제작비가 큰데 만드는 게 맞는지, 사이트 이름은 무엇으로 해야 할지 등 여러 가지 갈등이 많았다. 그때도 미술계에 있는 분들이 나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고 내가 해왔던 일에 대해 인정해 주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아, 그럼 내 이름을 브랜드화 하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트를 다루지만 아트가 들어가지 않은 사이트명 '달진닷컴'이 나왔고 그것이 매우 유효했던 것 같다. 나의 이미지와 사이트 이름이 맞물려 사업모델이 된 셈이다. 결국 한 사람이 살아온 것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여전히 ‘달진닷컴’이나 [서울아트가이드]를 통해 수익을 얻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2004년에 일본에서 열린 아트도큐멘테이션 연구회에서 발표를 마친 뒤 [서울아트가이드]를 소개했더니 거기 참석한 일본, 중국 관계자들이 매우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무가지를 발행하면서 직원 몇 명 월급 주고 사업으로 유지된다는 것이 자기 나라에선 생각하기 힘든 일이라고.

“개척자이기도 하고 꿈도 있고, 아직은 내가 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고교시절부터 30년 넘게 수집한 미술자료가 2만 점이 넘어가면서 자료의 보관과 공적인 활용 방법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한 것으로 안다. 그 결과 작년에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도 개관했다. 여러 방안 중에서 개인 박물관 설립으로 귀결된 과정과 이유가 궁금하다.

박물관으로 개관하는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고, 직원들의 찬반도 있었다. 망설였던 직접적인 이유는 우리나라가 항상 하드웨어를 중요시하는 나라이고, 박물관이면 어느 정도 기대하는 ‘공간’에 대한 개념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족하고 허름한 공간을 갖고 시작하는 것에 대해 망설여졌고, 박물관 설립 실사에서 거절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미비해도, 시작을 해야 그로부터 발전의 기회도 있다고 생각해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잘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많은 분들이 개관날 앉을 데도 제대로 없는 곳에 오셔서 자료수집의 중요성을 인정해 주고 힘을 실어주셨다. 그 중요성 때문에 개관하고 두 달 동안 언론매체에 소개된 것이 50회가 넘었다. 그건 개인적인 자랑이 아니라, 역으로 미술계에 이런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언론을 통해 홍보하고 환기하는 기회가 된다고 본다.

이렇게 부족한 공간을 갖고 개관했지만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힘을 얻었고,후원회까지 조직되었다. 결국 김달진이라는 개인 이름이 붙었지만,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미술계에서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굉장히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박물관 이름도 가칭 한국미술자료박물관으로 변경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아무리 귀중한 자료를 많이 보유하고 있어도 우리나라 현실에서 사설 박물관을 운영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 박물관의 비전과 계획은 무엇인가.

일단 좀 더 넓고 쾌적한 공간을 확보하는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서울시가 됐건, 국가가 됐건 공간 지원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고자 관청과 접촉도 해 보았지만 아직은 논의만 있고 실행된 것은 없다. 재원을 확충하는 것도 관건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이 분야의 전문가라면 전문가이고, 꿈이 있기 때문에 아직은 내가 좀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술자료에 대한 이해나 애정이 없는 개인에게 이런 것이 넘어간다면 여태까지 해왔던 것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더 나이가 들어 말년에 국가 등 공공기관에 기증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인 것 같고, 우선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공익적인 목적을 갖고 능력껏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미술계 파이 커지려면 세분화된 전문영역 인정하는 문화 필요”

한국의 미술 아카이브 현황을 개관해 본다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인식이 너무 부족하다. 대표적인 예로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전체예산에서 자료구입 예산이 1%가 안 된다. 87년부터 총 정원 100명 중 자료관리 인력은 계속 두 명이다. 80년대에 일 년에 2-3천 건 있던 전시가 지금은 8천 건이 넘는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자료의 양도 엄청날 텐데 인력은 전혀 보강이 안 되고 있다.

그러나 미술관 차원에서 자료를 수집 관리하는 것은 내부적인 용도가 크기 때문에 출발점이 다르다. 국가 차원에서 더 늦기 전에 미술자료를 문화재 차원에서 관리하는 아카이브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국립예술아카이브 설립 프로젝트 논의가 시작된 2000년대 초에만 시작했어도 지금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을 것이다. 미술자료 구축과 관련된 후원회, 학회도 만들어져서 학술적인 연구도 많이 해나가야 한다. 자꾸 일본과 비교하게 되지만 일본의 아트도큐멘트연구회가 올해로 설립 20년을 맞는다는 것을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오랫동안 미술계에 종사해 오면서 아쉽게 느낀 점은 무엇인가.

미술이라고 하면 창작이나 작가만 이야기하는데, 사실 미술은 비창작 분야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에 의해 창작이 더 활성화되고 가치가 부여된다. 평론가나 미술사가,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수복전문가, 아키비스트(archivist), 이런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좀더 기울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미술계가 더 발전하고 파이가 커지려면, 서로 각자의 전문 영역을 좀더 인정해주고 격려하는 문화가 중요하다. 서로 인정하기보다는 폄하하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으면 무관심한 풍토가 아쉽다.




“미술 분야 직제 세분화 되면 정말 필요한 직종이 아키비스트”

미술자료에 관심을 갖고 아키비스트(archivist)로 활동하고 싶은 후진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전문직으로서 아키비스트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종종 아키비스트라는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후배들을 볼 수 있다. 미술 분야 직제가 세분화 되면 정말 필요한 직종이 아키비스트이기 때문에 여기에 꿈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삶의 목표와 긍지를 갖고 매진하면서 스스로를 계발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어렵지만 이쪽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현실을 인내하고 개척하면서 자기 몫으로 만들어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미술자료 전문가는 그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하고 남과 차별화된 것을 갖추어야 한다. 자료 수집에서 분류, 정리 방법까지. 결국 그것은 자기 노력 없이는 안 된다. 문헌정보학도 알아야 되지만, 미술의 특수성을 알아야 한다. 정확한 정보를 갖고 이용자가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도 몇몇 미술자료 전문가들이 있는데, 이들이 계속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지 않아 귀중한 인적 자원이 소실될까봐 안타깝다.




▶ 김달진 관장

1955년 충북 옥천 생으로 서울 산업대 금속공예과와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화예술학과를 졸업했다. 월간 [전시계를 거쳐 1981년부터 9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에서 근무했고, 1996년부터 2001년까지 가나아트센터 자료실장을 역임했으며 2001년 김달진미술연구소를 개속하고 [서울아트가이드], 달진닷컴(www.daljin.com), 달진북닷컴(www.daljinbook.com)을 운영하고 있다. 1997년 월간미술대상 특별상을 수상했고 99년에는 한국의 신 지식인(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선정되었으며 2008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개관했다. 저서로는 「바로보는 한국의 현대미술」,「미술전시기획자들의 12가지 이야기」(공저)가 있다.

필자소개
양 지연은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예술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삼성미술관 연구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소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본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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