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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제1호 미술 자료 전문가
어렸을 때 취미였던 미술 자료 수집을 당당한 직업으로 만든 사람이 김달진이다. 우리나라 미술 자료 전문가 1호이다.
걸어 다니는 미술 사전
우리나라의 주요 미술가들의 경력을 머리 속에 줄줄 꿰고 있어서 사람들은 김달진을 걸어 다니는 미술 사전이라고 부른다.
미술정보의 보고
그가 운영하는 미술포털 웹사이트 '달진닷컴'(www.daljin.com)과 미술정보지 '서울아트가이드'는 우리나라의 미술정보의 보고이다. 2007년 미술자료실, 2008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개관하여 운영하고 있다.
>> 인터뷰
미술 자료 수집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셨습니까?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나라 근대미술 60년을 되돌아보는 큰 전시가 경복궁에서 열렸어요. 1900년에서부터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근대미술을 최초로 정리한 정부차원의 큰 전시였습니다. 그 전시를 보면서 내가 잘 알고 있는 박수근, 이중섭, 변관식 이런 사람들 자료는 쉽게 구할 수가 있는데. 다른 화가들의 자료를 찾기가 의외로 어렵더라고요. 당시 제가 서양미술의 명화를 오려 붙이고 그랬었는데, 그때부터 우리나라 근대미술 작가들에 대한 자료를 열심히 모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중적으로 미술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죠.
원래 미술 자체는 어릴 때부터 좋아하신 것입니까?어렸을 때는 긁적긁적 장난도 하고 좋아하잖아요. 그림도 어느 정도 그리니까 교실 뒤쪽에 게시판 만들어서 붙여지기도 하고 그랬는데, 제가 특별히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아니었어요.
김달진 미술 자료 박물관에 보유하고 있는 자료가 총 몇 권정도 됩니까?팸플릿 같은 경우는 워낙 많아서 숫자 파악이 안돼요. 작년에 파악한 것으로는 무게가 18톤 정도가 됩니다. 워낙 많아서 권수가 아니라 무게로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네요.
현재 하고 계신 일에 대해서는 만족 하세요?하 고 있는 일에 만족하고 긍지도 있고 사명감도 있어요. 내가 좋아서 열심히 하다 보니 그 방면에서 개척자이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어서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김달진 미술 자료 박물관을 개관하고 나서는 갈등도 생기고 굉장히 버겁더라고요. 내가 가지고 있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금 발전을 시켜야 하는데 그것이 돈하고 공간 문제와 부딪히게 되니까 힘든 일도 생기더라고요.
선생님은 취미가 직업이 된 경우인데요. 취미가 직업이 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예, 저는 미술 자료를 수집하는 취미가 직업이 되었어요. 굉장히 좋은 경우라고 봐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흥미와는 전혀 관련 없이 직업생활을 하고 있어요. 직업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전공이나 취미와 상관없는 곳에 가서 기계적인 일을 하면서 월급을 받고 있는데 이런 직장인들이 삶에서 자기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어요.
별명이 굉장히 많으십니다. ‘걸어 다니는 미술사전’이라는 것도 있던데 이 별명에 대해서는 만족하시나요?제 가 하는 일을 적당하게 표현된 별명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기억력이 좋아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어느 정도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에 대한 약력, 출생년도, 학력들이 제 머리 속에 있으니까 어디서 급하게 작가 정보를 찾다가 모르면 저한테 전화를 해요. 그러면 제가 바로 대답을 해 주어서 그런 별명이 붙은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이야 패턴이 달라졌지만 국립현대미술관에 근무하고 가나화랑에 근무할 때는 매주 금요일 날은 쇼핑백 매고 인사동에 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해서 금요일의 사나이라고 불렸어요.
미술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직업이 되었다는 것이 한편으로 신기합니다. 미술 자료 수집은 사회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나요?여 러 곳에서 미술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미술계의 문제점을 보게 되었어요. 미술 자료 수집이 개인적으로 끝났다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가 없어요. 근데 저는 그것을 사회적으로 공유했어요. 미술 자료 수집을 하면서 얻게 된 지식으로 평론가나 미술사가들이 얘기하지 않았던 미술계의 가장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꼬집어서 발표하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팸플릿에 실린 어떤 작가의 경력이나 연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한 것이죠.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제가 단순히 미술 자료 수집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미술계에서 저는 어떻게 보면 뉴스 메이커였어요. 미술계에서 미술 평론가나 미술사가와 다른 저의 몫이 있는 거죠.
선생님은 우리나라 미술 자료 전문가 1호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직업이든 1호는 상당히 외롭고 힘들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미술 자료 전문가로서 현재까지 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을 꼽으라면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나요?가 장 어려웠던 것은 국립현대미술관을 나오려고 할 때의 갈등이었어요.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그곳의 자료들은 모두 제 손때가 묻었어요. 나도 평생 거기를 내 직장으로 생각해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일반직이 아니라 별정직이어서 기능직이 되고 승진을 할 때 손해를 보았고, 월급도 보잘 것 없었어요. 결국은 다른 미술관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죠. 제가 전문적인 일을 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는데 그 정도로만 미술관에서 대우해 주는 것에 대해 좌절감을 많이 가졌어요.
지금은 대학원까지 나오셨는데 처음에 고등학교만 졸업한 학력으로 오랫동안 국립미술관에 근무를 하셨잖아요. 학력 때문에 실제로 손해를 본 것이 있나요?있 지요. 예를 들어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큐레이터 시험이 있는데 자격요건에 미술관련 대학의 학과를 졸업한 사람 이상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미술관에 근무를 하면서도 시험을 못 보는 거죠. 제도라든가 법적인 것 때문에 시험조차도 못 보니까 힘들었어요.
지금 굉장히 많은 자료를 모으셨는데 이게 사실은 돈이 들어가잖아요. 그래서 가족들은 말릴 수도 있는 것 같은데 집에서는 어땠나요?
중 고등학교 다니고 할 때는 어른들이 걱정을 했죠. 어른들 우스갯소리로 신문쪼가리 오려서 풀칠해서 종이에 붙이고 해서 밥 먹고 살겠냐고 그랬는데 결국은 그게 밥 먹고 사는 일이 됐고요. 그리고 제 아내는 제가 하려고 하는 일이 뭔가를 알았기 때문에 이해도가 커서 집이 살림이 어렵고 방이 좁고 그런 것에 대해서 아내가 인내를 해주었어요.
현재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신가요?미술자료박물관은 특성상 국가 차원의 일이라 한 개인이 감당하기는 어렵습니다. 자료를 보관하기 위한 공간조차도 심각하게 부족한 실정입니다.
지금은 미술 자료 수집을 하고 계신데요, 삶의 최종 목표는 무엇이신지요?우 리나라의 미술계 인명사전을 만들고 싶어요. 미술창작인에 대한 자료는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가 있는데 미술이론가라고 하는 미술평론가, 미술사가, 큐레이터, 아키비스트(Archivist) 등에 대한 자료를 구하기 힘들어요. 이들은 직접 그림을 그리는 창작인은 아니지만 미술계에서 일을 하는 미술인들입니다. 저는 이들 모두를 포함하는 미술계 인명사전을 제대로 만들고 싶어요. 또한 미술자료박물관이 발전하여 한국미술정보센터 설립으로 이어졌으면 합니다.
앞으로도 미술 자료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계속 하실 것으로 보이는데요. 미술 자료 전문가 이외에 하고 싶은 일들이 있으세요?저 는 스스로 반쪽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저는 오직 이것 뿐 이었어요. 제가 바둑이나 고스톱, 골프 같은 건 전혀 할 줄 몰라요. 눈만 뜨면 집이든 직장이든 미술 자료와 관련된 일을 해왔기 때문에 저게는 다른 즐거움이 없어요. 한국의 미술사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별이 있는가 하면 또 그 언저리에서 활동하는 많은 미술가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없어지기 전에 자료집으로 묶어 놓아야 해요. 저는 이 일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미술 자료 전문가가 되겠다고 하면 추천하시겠습니까? 이 학생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저는 추천하겠습니다. 평범한 것 보다는 남들이 덜 하고 앞으로 필요로 할 것이 예상이 되는 일을 하라고 청소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남다른 길을 가야 보람도 있을 테니까요. 청소년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이런 일입니다.
>> 주요 경력
-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
- 가나아트 센터 자료실장
- 現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관장
- 現 김달진미술연구소장
- [수상] 예총 예술문화 공로상
- [수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
- [수상] 미술인의 날, 미술문화공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