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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자료 수집으로 인생 승부수를 띄우다

관리자

[내고향 옥천] 김달진, 이원면 대동리 출신, 김달진미술연구소 소장


 
 
 ▲ 이원 대동리 출신 김달진 
 

그에 대한 자료는 방대했다. 그는 이미 미술계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서울 일간지와 각종 매스컴에서 그를 앞 다퉈 보도했고, 그는 자신의 영역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성공한 대명사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의 성공은 고비마다 드라마틱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그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원면 대동리 출신, 대성초 15회 졸업생인 김달진(50)씨는 살아가면서 한 우물을 파는 성실함이 인생에 어떤 즐거운 변화를 주었는지 그의 삶에서 보여줬다.

여기서 잠깐 그의 영화 같은 삶의 역정을 들여다보자.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그의 내성적인 성격은 더 깊어져 갔다. 공부는 곧잘 했지만, 대전중을 진학하려다 떨어져 대전 자양초에서 6학년을 1년 더 다니고, 충남중에 들어갔다고 했다. 초등학교 졸업 때부터 입시열풍이 불은 것을 보면 그 때는 더 심했는가 보다. 


대전 철도청 공무원이었던 셋째형(김성진)의 집에서 자취를 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중학교때부터 그의 취미는 발현되기 시작했다. 상표, 우표, 담뱃갑 등을 모으기 시작한 그는 여원, 여성, 주부생활 등의 여성 잡지에서 ‘이달의 명화’를 오리면서 예술작품 수집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충남중 재학시절에는 그의 글 솜씨도 충분히 발휘돼 1학년(레미제라블 독후감), 2학년(경주 기행문), 3학년(‘친구’ 수필)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이 교지에 실리기도 했다.  “다 고향의 자연이 준 감수성 덕분이었어요. 글을 쓴 것도, 예술쪽의 수집을 하게 된 것도 시골이 준 선물이라 생각해요.”


수집광으로서의 인생 승부
서울 한영고에 진학한 그는 수집 취미에 더 몰입하게 된다. 집안에서 `법관이 되라'는 기대에 대한 중압감이 큰 부담이 됐고, 대학진학도 어렵게 됐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공들여 온 수집취미로 자신의 인생 승부수를 띄웠다. `두드리면 열리리라’ 그가 오랫동안 모은 스크랩북과 그의 예술작품 자료 정리 및 수집에 대한 열정을 자기소개서로 담아 각 언론사 예술담당 기자와 미술평론가, 각 학교 박물관장 등에게 보냈다. 그는 복사기가 없던 시절 가리방(줄판)에 철필로 자기소개서를 새기며 등사를 해서 여러 장을 뿌리는 등 열정을 다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명언은 그에게 딱 들어맞았다.


당시 홍익대 박물관장인 이경성씨가 ‘한 번 오너라’해서 찾아갔고, 그는 15권짜리 스크랩북을 보여주며, 그의 열정을 보여줬다. ‘너를 기억해두겠다’라는 단 몇 마디 말을 큰 수확으로 삼았고, 그는 10여 년 후 이경성씨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되었을 때, 다시 찾아간다. 미술관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더라도 일하고 싶다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고, 그를 기억한 이경성 관장은 일당 4천500원짜리 일급을 마련해줬다 


거기서부터가 시작이었다. 물론 거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월간 전시계(사장 최학천) 기자로서 전시회 생활정보를 넘어서 미술평까지 하는 기사까지 쓰며 작가에게 거센 항의를 받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그런 경험은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81년부터 시작한 국립현대미술관 일용직 자료실 생활은 87년 1월에 별정직 7급으로 격상돼 빛을 봤지만, 3년 계약이 끝난 후 기능직 10급으로 낮아져 그는 속도 마음도 많이 상했다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일에 애정을 갖고 있었고, 혼신의 힘을 바쳐 일했다.


끊임없는 자기 노력과 학구 열
‘금요일의 사나이’라 불릴 정도로 매주 금요일만 되면 서울 전역의 전시관을 돌면서 팜플렛을 수집했다. 그는 앉아서 우편으로 오는 자료만 정리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또,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와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열망으로 성균관대 사서교육원을 수료했고 서울산업대 금속공예과를 삼수 끝에 들어가서 졸업후,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화예술과 석사를 따기도 했다. 하지만, 노력한 성과에 비해 인정받지 못했던 그 응어리는 14년간 몸담았던 국립현대미술관생활을 접게 된 동기로도 작용했다.

 

그는 한국미술계의 양대 화랑이라 할 수 있는 가나아트센터 자료실장으로 스카웃됐고, 총괄팀장으로 승진해 인터넷 사업을 개척하기도 했다. 그는 공고하게 자신만의 길을 가고자, 독립해서 나와 2002년 김달진미술연구소를 창립한다. 이미 ‘김달진’이란 이름은 미술자료수집의 1인자로, 모든 미술자료의 통계와 분석은 그에게 물어보는 등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되었다.


 ‘달진닷컴(http://daljin.com/)’이란 사이트를 운영하며, 오프라인으로 서울아트가이드북을 내는 등 그는 한국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의 하나가 됐다. 


그는 성장하면서 취미는 취미일 뿐, 일이 될 수 없다며 질타도 많이 들었지만, 그는 자신의 흥미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대해 주목했고, 꾸준한 노력 끝에 ‘취미의 공적환원’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단지 수집을 하고, 그것을 만족하는 수준에 그쳤다면 그는 한낱 수집광에 그쳤겠지만, 그는 취미로 자신의 인생을 바꿨고, 수집한 자료의 정확한 분석과 통계로 한국 미술계를 조금씩 바꾸고 있다.


학력과 배경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정확함, 그는 이 두 가지로 인생을 뒤집었다. 어머니 제사 때문에 고향에 내려 온 그를 5월8일 만났다. 그의 격정적인 인생얘기에 빠져 고향이야기는 많이 들을 수 없었지만, 옥천출신 예술인인 이숙자, 정영목, 하동철, 천복희씨 등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모교인 대성초에 가서 후배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줄 날도 있을 겁니다.”


- 옥천신문 2005.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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