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이응노(1904~1989)는 20세기 대표 화가로 꼽히는 작가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지난해 미술계 전문가 2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가장 많은 득표수를 얻었다. “20세기 수묵화 역사에서 희귀한 근대적 개성을 구축하고, 한국미술을 세계화 했다” 같은 평을 얻은 작가다.
이응노는 박근혜 정부에선 배제·검열의 대상 즉 블랙리스트였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진상조사위)’가 10일 발표한 분야별 블랙리스트 실행 사례를 보면, 박정희 정권의 ‘동백림 사건 블랙리스트’는 50년 후에 재현됐다.
박근혜 정부는 ‘프랑스 내 한국의 해’ 사업 중 하나로 프랑스 세르누치 박물관이 주관한 ‘이응노에서 이우환 : 프랑스의 한국화가들’(원제) 사업에서 이응노미술관 이지호 관장에 대한 출장비 지원을 철회했다. 사유로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이응노 작가를 위한 재단 운영”이라고 명시했다. 이지호 관장은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작성한 ‘문제단체 조치내역 및 관리방안’ 문건에서 블랙리스트로 기재됐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교문수석실은 이응노미술관 이름을 사업관련 모든 보도자료 및 홍보자료에서 뺄 것을 지시했다.
진상조사위 제공
‘이응노에서 이우환 : 프랑스의 한국화가들’은 ‘이응노’라는 이름이 빠진 ‘서울-파리-서울 : 프랑스의 한국작가들’로 바뀌었다. 수행단체도 이응노미술관이 아닌 (재)대전고암미술문화재단으로 변경됐다.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2014~2016년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실행됐다. 프랑스 북부 도시 릴에서 열릴 예정이던 ‘릴3000, Seoul vite, vite’전에서 노순택 작가의 ‘비상국가’ 시리즈가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블랙후크다운’ 시리즈로 교체했다. 당시 청와대가 해외문화홍보원장을 통해 지시를 내렸다.
공연 분야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다. 연극 <빛의 제국>의 프랑스 공연도 검열 대상이었다. 원작자인 소설가 김영하 초청도 방해했다. 김영하가 정부비판 글을 쓴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프랑스 초연에서 김영하를 초청하지 않는 안으로 정리됐다.
프랑스 파리 도서전 참여 작가도 배제했다. ‘프랑스 내 한국의 해’ 사업 중 하나인 파리도서전은 프랑스 내 한국문학 전문가들이 최소한 1권 이상의 작품이 프랑스에서 번역·출판된 작가 및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저명 작가를 초청하는 행사였다. 해당 사업을 추진한 한국문학번역원 담당자가 전문가들의 설문조사를 포함한 작가명단을 문체부에 보냈다. 문체부는 황석영, 김애란, 한강, 은희경, 김연수, 공지영, 임철우, 편혜영, 유은실, 김훈, 박민규, 박범신, 이창동 등을 배제 대상으로 표기한 문서를 첨부해 회신했다. 진상조사위는 “ 배제 대상 작가 중 황석영, 김애란, 한강, 임철우는 파리도서전에 참석하였는데, 이는 문체부의 파견 불허 통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조직위 측에서 해당 작가에 대한 초청비용을 부담하여 초청했다”고 했다.
파리 도서전 블랙리스트. 정부는 초청 선정 대상은 노락색으로, 배제 대상은 색 없이 표기했다. 진상조사위 제공
부당한 검열과 상영 개입 사례도 나왔다. 프랑스 아르떼TV 다큐 ‘한국, 다양한 기적의 나라’도 검열하고, 자막 지원을 철회했다. ‘한-불 조직위’는 다큐멘터리 DVD 출시를 위한 한국어 자막 번역비 2625만원 지원을 결정했으나, 청와대 배제 지시 이후 철회했다. 다큐 5부작 중 제주도 편에서 강정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종교인 인터뷰를 문제 삼았다.
무차별 블랙리스트를 집행하다 보니, 어이 없는 사례도 발견됐다. 박근혜 정부는 ‘블랙리스트’로 활용된 시국선언자 9473명 명단에 포함된 영화감독 김종석씨를 배제하려다가, ‘한국음악과 함께 하는 불꽃축제’ 사업에서 동명이인을 배제한 것으로 밝혀졌다.
- 경향신문 2018.04.10 유정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