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후 17세기 들어 재건이 시작된 사찰을 위해 대량으로 제작된 불상들을 고유한 특징에 따라 다섯 개의 유파로 나누어 조각승들의 계보를 완성한 책이다. 십여 년 동안의 방대한 연구자료는 종교미술에 대한 이해를 도울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 조각사의 저변을 확대해준다.
책소개
왜 절에 있는 불상은 다들 비슷해보일까
국내 여행을 하게 되면 여행지의 유명한 사찰에 한번쯤 들르게 된다. 수학여행이든 가족끼리의 단란한 여행이든, 산 속 적당한 곳에 자리 잡은 절에 들러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고 조상들이 남긴 전각이나 불상을 보고 오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다녀온 절에 혹시 어떤 불상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회사 워크숍으로 갔던 하동 쌍계사 대웅전에 있는 불상과 지난 주말 가족들과 함께 다녀온 강화도 전등사 대웅전에 있는 불상을 놓고 각각 어디에 놓여 있었던 불상이냐고 묻는다면 구별할 수 있을까? 그러고보니, 절에 있는 불상들은 어째서 다 비슷해보이는 것일까. 정말 비슷한 것일까 아니면 비슷해보이는 것일까?
조선시대 중반, 임진왜란이라는 재앙이 전 국토를 휩쓸고 지나갔다. 궁궐은 물론 사찰까지 모조리 불타버린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전국적 재건이 시작되는데 이때 사찰도 함께 재건된다. 지금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절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전국적으로 사찰이 다시 지어지면서 새 불상 역시 대량으로 요구되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불상들이 조성되었고, 이때 만들어진 주존불들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불상들의 모습이 서로 비슷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그것도 17세기라는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그 유사성은 더욱 강할 터였다.
미술로서의 불상, 미술가로서의 조각승
우리가 불상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불상들은 만들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미술작품이라기보다는 종교시설물의 하나인, 예불을 드리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종교적 기능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예술작품으로서 불상을 인식할 기회가 별로 없었고, 따라서 외관상 특징에 주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불상들도 장인의 손을 거친 엄연한 미술작품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사찰에 놓인 불상을 조각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이 많은 불상을 동시다발적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이들은 승려이자 조각가였던, 조각승(彫刻僧)이었다. 기록에는 이들을 화원(畵員) 혹은 화사(畵師)로 칭하고 있으나, 실제 승려였다.
라파엘로의 공방과 조각승들의 작업체계
대량의 불상이 동시에 필요했던 시대적 상황은 당시의 조각승들로 하여금 공동 작업이라는 작업 방식을 채택하게 한다. 조각승들이 집단을 이루어 돌아다니며 공동으로 불상조성작업을 한 것이다. 이 집단은 수화사(首畵師)로 불리는 우두머리 조각승 아래 차화사(次畵師), 그리고 일반 조각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본문 84쪽). 수화사는 작업을 실질적으로 진행하는 감독으로, 가장 중요한 밑그림 그리기와 마무리 작업을 맡았다. 수화사가 밑그림을 그리고 나면 차화사 및 나머지 조각승들이 수화사의 감독하에 전체 통나무를 깎아 몸체를 만들었다. 그 후 얼굴, 다리, 옷주름 등 부분조각을 마치면 마지막에 수화사가 전체적으로 마무리를 한 후 작업을 완성하였다. 마치 마스터는 작품을 수주받고 작품의 얼개를 구성하고 밑그림을 그리면, 제자들이 물감을 개어 채색작업을 도왔던 서양의 작업공방처럼, 17세기의 조각승들은 집단 작업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였다.
다섯 유파의 성립, 이름을 알 수 있는 조각가의 등장
수조각승 아래 공동으로 작업을 진행하면서, 조각승들은 자연스레 수조각승의 작풍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조각승 집단의 유파가 성립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국미술사에서 그 구체적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첫 작가 그룹이 형성된 것이다. 1610년대에 현진·청헌을 수조각승으로 한 유파의 성립을 시작으로, 응원·인균파, 수연파, 법령파, 무염파, 이렇게 다섯 유파가 17세기 전반에 확립되었다.
이들은 처음으로 한국 조각사에서 ‘작가’라는 개념을 부각시킴으로써 한국 미술사에 중요한 의미를 던졌다. 17세기의 조각승들은 자신들이 조성한 불상 안에 제작연도, 제작에 참여한 조각승 명단 등을 기록한 종이를 넣어 봉안했다. 복장발원문(腹藏發願文)이라 불리는 이 기록을 통해 비로소 우리의 미술사에서 그 이름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최초의 조각가들이 등장한 것이다.
가장 규모가 큰 집단의 경우 3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컸던 이들 작가 그룹-유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들이 경제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수량의 불상들이 지속적으로 조성되어야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의 활발한 활동은 당시에 충분한 사회적·경제적 여건이 주어져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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