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로티시즘 : 여성의 눈으로 본, 미술 속의 에로티시즘
- 청구기호601/김64ㅍ
- 저자명김영애 지음
- 출판사개마고원
- 출판년도2004년
- ISBN8957690093
- 가격16000원
길쭉한 모습의 모딜리아니 그림 속의 여인, 클림트의 뇌쇄적인 여인들, 피카소의 엽기 발랄한 성적 묘사 등 미술작품 속에서 ‘에로티시즘’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사실 우리 생활 곳곳에도 에로틱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물건들이 널려 있다. 굳이 여러 철학자들의 성과 사랑에 대한 분석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에로티시즘은 우리 인간의 영원한 동경과 갈망이자 화두요 금기인 것이다. 때문에 미술작품 속에 드러난 에로티시즘을 논하는 것이 그리 새로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에로티시즘을 둘러싼 논의의 대부분은 남성적 시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도 여성의 입장에서 그것을 대할 때는 다소 불편하거나 동의되지 않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는 미술 속 에로티시즘을 논하는 것이 성의 담론화라는 핑계 아래 섹슈얼리티를 상품화하는 데 일조하게 되는 건 아닌지, 또 “누드화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예술적 교양이라는 이름 하에 남성들의 시각적 눈요깃거리를 제공해주는 것”은 아닌지 하는 고민을 안고,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에로티시즘을 논함에 있어 단순히 작품의 감상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리하여 “왜 이 작품은 에로틱한가, 그리고 이 에로티시즘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결국 예술이란 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로까지 나아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성 위주로 이뤄져왔던 에로티시즘의 한계도 짚어내고자 한 것이다. 바로 그런 고민의 연장선에서 책 제목 역시 ‘페미니즘(feminism)’ 또는 ‘피메일(female)’과 ‘에로티시즘(Eroticism)’을 합성한 조어 ‘페로티시즘(Feroticism)’이라고 붙이게 되었다.
에로티시즘으로 가는 세 가지 코드: 신체 / 사회 / 상상력
미술과 에로티시즘을 연결하는 끈으로서 저자는 신체 / 사회 / 상상력을 제시한다. 우선 신체는 개인과 개인이 접촉하는 최초의 지점이라는 점에서 에로티시즘의 가장 기본적인 매개체가 된다. 사실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는 미술작품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육체를 떠나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리고 예술행위가 기본적으로 타인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작업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예술도 하나의 사회활동이라는 지점에서 예술작품의 사회적 측면이 외면될 수 없었다. 똑같은 작품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는 환영받지만 또 다른 어떤 곳에서는 냉내받는 것도 우리로 하여금 예술작품의 사회적 맥락과 해석을 생각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상상력’. 한눈에 드러나는 에로티시즘을 넘어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에로티시즘을 들춰내는 힘은 바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상상력에서 나온다. 언뜻 평범한 돌덩이로 보이는 것도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다시 보면, 색다른 에로티시즘을 드러내는 하나의 작품으로 다가온다. 저자는 고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특히 20세기의 미술작품들을 중심으로 에로티시즘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국내에 생소한 현대 작가를 포함, 다양한 관점과 작품 제시
사회가 다원화될수록 에로티시즘 역시 작가들 각자의 입장에 따라 복잡다단하게 펼쳐진다. 다같이 에로티시즘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 양태와 의미 맥락은 19세기의 순수하고 단편적인 시각과 20세기 말의 혼돈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룬다. 다 같은 에로티시즘이 아닌 것이다. “벌거벗은 여인을 정면에서 그리되 획기적이고 감동적이고 깜짝 놀랄 만한 방식”으로 그려줄 것을 요구받아 19세기 말 쿠르베가 그려낸 [세계의 근원]과 20세기 말 여성 작가 오를랑이 이 작품을 패러디해 제작한 [전쟁의 근원]을 비교해 보면, 시대에 따라 또 작가의 성적 정체성과 입장에 따라 에로티시즘이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는지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밖에도 한스 벨머의 인형 작품들을 통해 여성의 신체가 어떻게 극단적으로 물화(物化)되었는지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에서 여성의 신체는 비틀리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보는이에게까지 그 고통이 전이된다. 또 남성 작가들의 작품들에서는 언제나 당당하게 곧추서 있던 남근을 초라하게 형상화한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 [소녀]는 그것을 옆구리에 끼고 웃고 서 있는 작가의 사진과 더불어 우리에게 또다른 에로티시즘을 느끼게 한다. 그간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성을 뒷받침하는 남근을 조금은 초라하게, 그래서 보호해야 할 무엇으로 처리한 작가의 손길에서, 그리고 그 작품의 이름을 [소녀]라고 명명한 것에서(이 작품의 두 개의 볼은 언뜻 보면 여성의 유방 같기도 하고 남성의 고환 같기도 하다) 기존의 남근적 개념에 기대고 있지도 않으며, 또한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구분에 큰 의미를 두지도 않는 작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19세기의 화폭에서는 한켠에서 수줍은 듯, 그러나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은밀히 건드려주던 모습으로 등장하던 여성이 주디 뱀버, 루치오 폰타나, 낸 골딘, 소피 칼 등 우리에게 조금은 생소한 현대작가들의 작품들 속에서는 무덤덤한 생활인의 모습으로, 때로는 몇 겹의 상징을 담은 알 수 없는 형태로 다가와 ‘낯선’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