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 내 영혼의 빛깔과 시
- 청구기호650.9929/김75ㅅ
- 저자명김종근 지음
- 출판사평단문화사
- 출판년도2004년
- ISBN8973432095
- 가격15000원
빛을, 특유의 원시 감각으로 빚어, 독자적인 색채미학을 낳은 화가를 알고 있는가. 해바라기처럼 그 자신도 열광적으로 빛과 놀아난, 진정 유희적인 화가를 아시는가. ‘유대인 화가’라고 불리기보다는 ‘세계 시민의 화가’로 불리길 강력히 원했던 사람을? 그가 바로 마르크 샤갈이다. 일찍이 피카소는 샤갈을 두고 “마티스가 죽은 후, 진정으로 색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화가는 샤갈뿐이다. 르누아르 이래 샤갈처럼 빛을 잘 이해한 화가는 없다.”고 극찬했다. 샤갈은 결코 주류에 편입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범우주적인 낙원을 일군 위대한 화가다. 그는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했지만 몇몇 시인들을 제외하곤 한 번도 그들과 진심으로 동화되지 못했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인 마티스나 피카소와도 그는 깊게 교감하지 못했다. 이 외로운 사내가 빛에 몰두하고 그 빛에 영혼을 바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왜 그는 외로워야 했을까. 왜 그는 종국에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할 수밖에 없었을까. 고향 비테프스크에서 더 큰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보다 더 큰 도시 파리로 수없이 적을 옮겨 그림작업을 했지만 본질적으로 그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유도했던 도시는 비테프스크였는데 과연 이 초라한 도시의 무엇이, 샤갈을 그토록 흥분시켰을까. 또한 일생동안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하시디즘 유대교란 정확히 어떤 것인가.
「평단아트」는 ‘샤갈’이라는 한 예술가를 통하여, 당대의 시대상황과 주요 인물들을 파악하고 이 예술가에게 미쳤던 사상과 이념을 고찰하기 위해 [샤갈, 내 영혼의 빛깔과 시]를 기획하였다. ‘어머니가 말하는 샤갈’, ‘샤갈이 말하는 샤갈’, ‘평론가가 말하는 샤갈’로 내용을 분류하여 샤갈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끔 유도했다. 또 본 저서는 샤갈이 당대의 유명 인사들인 아폴리네르, 말로, 들로네, 예세닌, 상드라르, 마야코프스키, 고리키 등과 관계하면서 느꼈던 생각들을 여유롭게 좇아가면서 샤갈만의 예민하고 소극적인 사회성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샤갈이 주류 유파인 큐비즘에 넌더리를 내며 괴로워할 때, 상드라르가 “입체주의 곁에서도 넌 조용히 네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야? 라고 샤갈을 위로한 대목도 흥미진진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샤갈이 러시아 사회주의자였던 고리키를 찾아가, 선생직을 부탁했을 때 이 민중작가가 단호히 거절한 장면도 묘사되어 있어 책의 내용을 풍성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한 나약한 유대 소년이 어떻게 세계적인 예술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는지를 추적하고, 18세기 러시아 목판화가 어떻게 샤갈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그 희귀한 자료들을 수록하여 샤갈 그림과 비교할 수 있게 했다. 자, 이제 샤갈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본질적인 기원을 찾아나설 때이다.
샤갈 예술의 원초적인 영감은 고향 비테프스크와 하시디즘 유대교
샤갈은 자서전 《나의 생애》에서 “나의 부모님과 나의 아내와 나의 고향 마을에 이 책을 바친다”고 썼다. 그가 사랑한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 당당히 위치한 이 행운의 도시 비테프스크는 과연 어떤 곳인가? 제1부 ‘어머니가 말하는 샤갈’에서는, 고향 비테프스크와 하시디즘 유대교라는 신비유대교가 어떻게 샤갈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탐구한다. 예컨대 러시아의 유대인거주지역인 비테프스크는 어린 샤갈에게 대단히 원시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샤갈이 “슬프고도 즐거운 나의 도시여!”라고 읊었던 비테프스크는, 지붕 위로 올라가 바이올린을 켜는 외할아버지와 푸줏간, 마을의 집달리, 행상인, 담장 앞의 돼지들이 있는 풍경으로서 샤갈의 마음에 깊이 각인된다. 특히 외할아버지의 집에서 수없이 봐왔던 도살된 암소들은 샤갈에게 슬픔과 죄의식을 안겨준다. 또한 잔인하게 암소들을 도살해놓고는, 그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샤갈에게 기이한 인상을 남긴다. [가죽을 벗긴 소]는 이런 어릴 적의 경험과 의문이 예술적으로 승화된 작품이다. 이것은 샤갈이 네덜란드의 거장 렘브란트의 동명 작품에서 모티프를 얻어서 그린 작품인데, 샤갈이 얼마나 렘브란트를 숭배했는지 책에 그 내용도 곁들어 있어 풍성하다. 예를 들어 샤갈은 자신의 1915년작 [밝은 적색의 유대인]에 렘브란트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써넣기까지 한다! 샤갈은 수탉 같은 동물들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캔버스에 표현하곤 했는데 이는, 그가 하시디즘 유대교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제도권 종교라 할 수 있는 정통유대교에게서 노골적인 배척을 받던 하시디즘 유대교는 크고 작은 모든 사물과 선하고 악한 모든 사람에게서 '신성한' 불꽃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서민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한 이 종교가 샤갈을 암소와 당나귀, 수탉 같은 동물들에게로 인도한 것은 당연하다. 그가 생명에 가까운 색을 동물들에게 입히고 급기야, 이들에게 신성을 부여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샤갈의 예술세계의 중심에는 벨라가 있었다. 버지니아(딸 이다의 친구), 종착역 바바와의 정열적인 사랑! 그리고 샤갈의 유일한 딸 이다의 내조가 있었다
“오랜동안 그녀의 사랑은 나의 예술을 채워왔다.”
제2부 ‘샤갈이 말하는 샤갈’에서는, 샤갈에게서 영혼을 빼앗은 뮤즈, 벨라와 그녀가 죽은 뒤 샤갈의 내조를 맡게 되는 두 여인 버지니아, 바바를 비중있게 다룬다. 언젠가 샤갈은 “내 약혼녀는 라파엘로의 성모보다도 순결하다” 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의사의 딸과 사귀던 중 벨라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녀는 샤갈의 많은 초상화에서 연인으로, 아내로, 산모로 등장하여 샤갈 작품의 아름다움에 빛을 더한다. 샤갈의 1917년작 [흰 깃옷을 입은 벨라]를 보면 화면 전체를 차지하고 서 있는 벨라의 아래에 샤갈과 딸 이다가 조그맣게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샤갈의 중심에 벨라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 [비테프스크의 누드]에서 그림 위쪽에 솟아 있는 벨라는 다른 사물보다 유독 큰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고 [땅거미 질 무렵]에서는 화가 샤갈이 팔레트를 손에 들고 사랑하는 벨라에게 밀착되어, 결코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벨라는 샤갈에게 “유대 예술의 뮤즈”였다. 그런 벨라가 갑작스레 죽자 샤갈은 극도의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그를 위로한 여인은 딸 이다의 친구 버지니아였다. 책에서는 버지니아가 샤갈의 가정부로 들어가서 어떻게 샤갈을 위로하고 마침내 은밀한 부부 사이가 되는지, 아들 데이비드를 낳았지만 왜 버지니아는 가난한 벨기에 사진작가와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린다. [꽃다발과 하늘을 나는 연인들]을 보면 샤갈과 버지니아의 초기 열정적인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샤갈의 마지막 사랑인 발렌티나 브로드스키. “내 아버지가 청어를 운반하고 있을 때 키예프의 브로드스키 가문은 틴토레토의 작품을 사들이고 있었을 것이다.” 샤갈이 이렇게 말했듯 그의 마지막 연인은 좋은 가문의 여자였고 샤갈은 명상적인 그녀를 ‘바바’라고 불렀다. 벨라를 제외한 샤갈의 두 명의 여자는 모두 아버지의 전적인 내조자 딸 이다의 소개로 이뤄진 것이었다. 사실상 이다는 벨라의 후임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1934년 내 딸, 이다는 18세의 나이로 그녀보다 몇 살 연상인 변호사와 결혼했다. 그러나 왠지 내 마음은 기쁘지만은 않았다.” 샤갈의 이 말은 왠지 의미심장하고, 이다가 샤갈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여러 가지 해석을 낳게 한다.
피카소, 찰리 채플린, 아폴리네르, 상드라르, 말로, 예세닌, 고골리는 샤갈에게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위대한 예술가들이 그렇듯 샤갈도 당대의 많은 예술가들과 교우를 하고,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거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제2부와 3부에서는 샤갈의 다양한 인간관계를 조명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소수를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공감하지 못했던 샤갈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그린다. 먼저 피카소는 샤갈과 거의 앙숙관계였다. 책에서는 두 사람간의 일화를 흥미롭게 소개하며, 피카소에게 질투와 선망의식을 동시에 갖고 있었던 샤갈의 미묘한 심리를 묘사한다. 특히 1914년작 [피카소를 생각한다]와 1921년작 [피카소에 진절머리가 난 샤갈]을 비교해서 보면 피카소에 대한 샤갈의 생각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알 수 있어 자못 흥미롭다. 피카소 역시 샤갈을 인간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르누아르 이래 샤갈처럼 빛을 잘 이해한 화가는 없다는 확신이 들었지” 라고 말함으로써 샤갈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샤갈은 찰리 채플린에게서 우스꽝스러운 몸짓 뒤에 숨겨진 슬픈 정서를 발견하고서 [찰리 채플린]과 [찰리 채플린에게]를 그려, 이 진정한 광대에게 경의를 표했다. 한편 샤갈이 “부드러운 제우스”라고 부른 시인 아폴리네르는 독일의 출판업자이자 화상인 발덴을 소개해주어 최초로 독일에서 전시회를 갖게 해주는 등 샤갈의 예술인생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으로 자리한다. 샤갈이 얼마나 아폴리네르를 존경했는지는 그의 1912년작 [아폴리네르에의 오마쥬]를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샤갈은 유독 괴짜소설가이자 시인인 상드라르와 친했는데, 상드라르는 샤갈의 작품에 아름다운 제목을 붙여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러시아와 나귀들과 기타 등등에게], [내 연인에게 바침]같은 시적인 제목들이 그것. 이런 상드라르를 두고 샤갈은 “저기, 가볍게,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또다른 빛. 내 생애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드라르가 샤갈의 작품들을 허락 없이 수집가에게 대거 넘긴 후로 이 두 사람의 우정은 깨지고 만다.《인간의 조건》으로 유명한 작가 앙드레 말로 역시 샤갈과 유대관계를 맺었다. 말로는 1924년에 바르바장주 오드베르 갤러리에서 샤갈의 환상적인 작품을 처음 보고는 샤갈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후에 문화부장관이 되었을 때, 파리 오페라극장 천정화 제작자로 샤갈을 추천한다. 그 후 말로는 샤갈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고 샤갈 역시 말로의 책 《지상에서》속에 삽화를 그려줌으로써 우정을 과시한다. 러시아의 농민시인 예세닌도 샤갈이 아주 좋아한 친구였다. “자네의 목소리는 터무니없이 높았어, 이 사람아. 하지만 난 알아. 자네는 술에 취한 게 아니라 신에 취한 것이란 걸.”
이 짧은 말은 샤갈이 예세닌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이 책에는 샤갈이 고골리를 열렬히 찬양한 대목도 나오는데 예를 들어 샤갈은 고골리의 희곡 [도박사]의 무대장치를 작업한 뒤 그림 안에 러시아어로 ‘샤갈에서 고골리에게로’라고 써넣었다. 그림에서 월계관을 손에 쥐고 발로 교회를 떠받치고 있는 듯한 대단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람은 샤갈 자신이고, 그가 존경하는 고골리에게 인사를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혁명기의 러시아에서 예술인민위원이 되고 예술학교 교장직을 잠시 역임, 전쟁고아 거주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또한 2부, ‘샤갈이 말하는 샤갈’에서는 샤갈이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어떻게 휩쓸리고 대처하는지를 보여준다. 파리 체재 후 4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 비테프스크에서 벨라와 결혼식을 올린 샤갈은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유럽으로 가지 못하고 한동안 러시아에 머문다.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샤갈은 새 정부의 문화부 미술담당관으로 추천되었으나 거절, 이듬해에 비테프스크의 예술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혁명 1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인 거리 장식을 총 지휘한다. 본질적으로 비이념가였던 샤갈의 장식은 당국의 관리인들에게 배척받았다. 샤갈의 말과 수소는 마르크스, 레닌과는 상관없었기 때문. “대체 마르크스가 어디에 있는 건가. 어디에 있다는 건가.” 거리 여기저기에 세워진 마르크스 흉상을 보고 샤갈은 이렇게 탄식했다. 샤갈이 레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그의 1937년작 [혁명]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림 중앙에 혁명 주동자 레닌이 테이블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고, 기도하는 유대인이 레닌이 있는 테이블 옆에 앉아서 사태를 달관하고 있다. 이로써 샤갈은 러시아혁명을 풍자하고 있는 것. 한편 샤갈은 비테프스크에 ‘예술학교’를 세운다. 엘 리시츠키, 말레비치, 빅토르 메클러 그리고 예후다 펜 등 화려한 강사진으로 꾸며진 이 학교에 샤갈은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얼마 후 학교 내부자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게 된다. 이유인즉, 그 사람들이 너무 정치적이어서 샤갈의 운영방침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 시인 막심 고리키는 강사직을 맡아달라는 샤갈의 부탁을 처음부터 사양했었다.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메클러와 샤갈을 ‘메시아’로 여겼던 제자 리시츠키의 배반은, 상처받기 쉬운 나약한 영혼의 샤갈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정치적인 역학 관계보다 예술의 권위를 더 중히 여겼던 샤갈에게, 학교측의 이반은 당연한 것이었다. 인민위원회 역시 샤갈을 ‘1등급’ 화가에서 ‘3등급’ 화가로 추락시켰다. 본질적으로 샤갈은 비정치적인 인물이었기 때문. 비참함을 안고서 비테프스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이주한 샤갈은 연출가 에프로스의 요청을 받고 유대예술극장인 ‘이디시 유대극장’에 심혈을 기울여 벽화를 그린다. 실내장식뿐만 아니라 배우의 의상디자인까지 도맡았던 샤갈은 물자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아준 헌옷에다 물감을 들여서 가까스로 완성했다. 이에 연출가 에프로스는 “신에게 도취된 이 샤갈보다 더 놀라운 창의적인 상상력을 지닌 사람은 없다”고 찬사를 보낸다. 얼마 후 샤갈은 정부기관의 의뢰로 ‘제3인터내셔널’에서 전쟁 고아들을 가르친다. 단지 숙식만 해결할 수 있는 곳에서! 전쟁과 혁명이라는 거창한 명분 아래서 가족을 잃고 내팽개쳐진 고아들을 샤갈은 사랑하였다. 그는 1년 동안 이 아이들을 가르친다.
러시아 18세기 목판화, 큐비즘, 오르피즘, 야수파 등에서 영향을 받은 샤갈 예술! 그러나 본질적으로 샤갈은 러시아적이었다!
위대한 천재화가라고 해서 혼자 독자적으로 예술세계를 완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샤갈 역시 마찬가지. 이 책에선 제 1,2,3부에 걸쳐 샤갈의 예술 세계에 영향을 미친 화풍과 유파를 다루는데 그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것은 바로, 러시아 18세기 목판화이다. 샤갈은 언제나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작품은 독자적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사실 그의 예술을 관통하는 흐름은 러시아의 18세기 목판화와, 하시디즘 콩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에는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는 러시아의 18세기 목판화가 수록되어 있어, 샤갈의 그림과 비교해서 감상하는 묘미가 있다. 샤갈의 그림에 자주 나오는 수탉이나, 날아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러시아의 18세기 목판화에서 먼저 발견할 수 있는데, 가령 책에 수록된 목판화 중 굴뚝에서 사람이 나와 하늘을 나는 장면은 샤갈의 [하늘을 나는 연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그림에서 변형되어 나타나 있다. 한편 1910년대에 파리에서 큐비즘을 처음 접한 샤갈은 평소 큐비즘(입체주의)에 대해 “때려부수자. 너희들의 세모난 식탁 위에 네모난 배들을 올려놓고 배고파 죽어버려라.” 하고 저주의 말을 퍼부었지만 그 자신이 큐비즘에 따라 여러 작품을 남겼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가축상인], [아폴리네르에의 오마쥬] 등은 샤갈이 어떻게 큐비즘을 차용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분석적 입체주의라 불리는 오르피즘 역시 샤갈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색채를 중시하는 시적인 입체주의인 오르피즘의 영향을, 샤갈은 극구 부인했으나 그의 1911년작 [세 시 반], 그 이듬해작 [아담과 이브] 등은 형태의 파편화와 공간적 모호성으로 하여, 그 영향력을 입증한다. 야수파도 샤갈 예술에 흔적을 남겼다. 이 화풍은 당시 유행에서 밀려난 상태였지만 ‘색채의 해방’ 이라는 이념 아래 힘찬 붓터치와 색채의 자율성을 추구하였으므로 샤갈에게 얼마간 공감을 끌어냈다. 앞서 언급한 [세 시 반]의 경우, 야수파의 특징인 비자연주의적 색채가 잘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샤갈은 화려한 모든 유파들을 나름대로 섭렵했고, 수많은 작품으로써 재해석했지만 본질적으로 그의 예술은 러시아적이었다. 러시아의 하시디즘 유대교와 기이하고 독특한 유대 풍습이 샤갈 평생의 예술 자원이었다는 것을 저자는 지적한다.
샤갈 생애의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들: 야수 같은 아버지, 유대인거주지역을 벗어나 감옥신세를 진 기억, 최초의 후원자 비나베르 씨, 화상에게 도둑맞은 일, 화상 발덴과의 소송, 프랑스 시민권 박탈, 나치에 의한 ‘타락 예술전’ 참가 등…
샤갈에게 연민의식과 죄의식을 불러일으킨 사람을 꼽으라면 늙은 유대인도, 부랑아도 아닌, 바로 자신의 아버지일 것이다. 본문에서는 아버지를 향한 샤갈의 복합적인 감정이 심리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어 독자의 흥미를 돋군다. 예를 들어, 청어 도매상의 육체노동자였던 아버지는 샤갈의 내면에 수치심과 동정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자리한다. 그는 샤갈에게 미술학교 등록비 5루블을 주면서, 돈을 식탁 밑으로 던져버린다. 어린 샤갈이 무릎을 꿇고 식탁 밑으로 기어가서 돈을 줍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또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상경하는 샤갈을 위해 가짜 체류허가증을 구해다주는 자상함도 발휘한다. “그의 이빨. 하찮은 모든 것들의 이빨을 상기시키는 내 아버지의 이빨.” 이 시적인 말은, 샤갈이 제 아버지를 지독한 연민과 사랑, 부끄러움으로 대하고 있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본문에서는 샤갈이 유대인거주지역을 벗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허가증도 없이 떠돌다 경찰에 붙잡혀 유치장에 갇힌 장면도 다루고 있다. 이곳에서 창녀와 도둑들을 보면서 샤갈이 느꼈던 감정들이 서정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집없이 떠돌던 샤갈을 구제하고 최초로 후원자가 된 유대인 변호사 비나베르도 본문에서 비중있게 다뤄진다. 이 변호사는 한동안 노숙자숙소에서 잠을 자야 했던 샤갈에게 아파트를 임대해주고, 마침내 샤갈이 파리에 갈 수 있도록 장학금까지 준다. “나의 아버지가 내게 세상을 주었다면 비나베르 씨는 내게 그림을 그릴 여유를 주었다.” 샤갈은 자서전 《나의 생애》에서 특별히 비나베르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는 샤갈이 왜 갈수록 좀처럼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는지 그 단서가 되는 장면도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샤갈이 모사품을 화구점에 가져갔는데 주인은 50여점이나 되는 그 그림들을 꿀꺽했던 것. 또 출판업자 발덴이, 비테프스크로 떠나기 전 샤갈이 맡겨둔 수십여 점의 작품을 수집가들에게 팔아넘겨서 4년 동안이나 법정 싸움을 해야 했던 일도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나치즘이 절정에 달하던 1937년에 샤갈은 프랑스 시민권을 박탈당하는데, 샤갈이 한때 비테프스크에서 인민위원직을 지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이것은 나치즘에 굴복한 프랑스 당국의 반유대주의 정책에 의한 조치였다. 같은 해 나치는 독일 공공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던 샤갈의 작품 50여 점을 몰수하여 그 중 [부림절], [사람과 소]등을 ‘타락 예술전’에 내보냈다. 전자가 유대인인 샤갈을 모욕한 것이라면 후자는 유대인 예술가인 샤갈을 모욕한 것이리라.
샤갈 예술의 또 하나의 원천, 성서와 방대한 걸작 스테인드글라스
“예술과 인생의 완벽함은 성서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샤갈이 확신에 찬 어조로, 한 말이다. 제3부 ‘평론가가 말하는 샤갈’에서는, 샤갈의 예술본능을 원초적으로 자극했던 영감들을 살피고, 그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들에 관해서 서술한다. 또한 샤갈이 왕성한 창작욕을 발휘하는 새로운 장르인 도예, 스테인드글라스, 모자이크를 다루고, 마지막으로 샤갈 예술의 결정체인 ‘성서 미술관’을 이야기한다. 먼저, 성서는 평생 동안 샤갈을 매혹시킨, 예술의 원천이었다. 그는 시처럼 성서 그림 역시 사람들에게 영혼의 울림을 줄 수 있을 거라 믿었고 [인간창조]를 시작으로 [야곱과 천사의 힘겨루기], [노아와 무지개], [사라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브라함]등의 많은 성서 연작을 그렸다. 이를 두고 미술사가 마이어 사피로는 “샤갈의 [성서 이야기] 연작이 없었다면 우리는 가장 위대한 현대 예술가의 한 명으로 꼽히는 샤갈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샤갈은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었다. 도예와 모자이크, 스테인드글라스, 천정화가 그것. 나이 70이 넘은 이 노화가는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두고 “대체 이론이나 기술이 뭐란 말인가? 재료와 빛, 여기에 바로 창조가 있는 것이다!” 말하고, 위대한 걸작 [이스라엘의 12부족]을 완성한다. 마지막으로 ‘마르크 샤갈의 성서 미술관.’ 프랑스 니스의 바다 해안, 작은 언덕에 세워진 ‘마르크 샤갈의 성서미술관’에는 샤갈이 성서를 테마로 한 유화, 구아슈 , 판화, 도예, 소품의 조각들이 총 망라되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