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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테 콜비츠

  • 청구기호659.9925/콜48ㅋ
  • 저자명캐테 콜비츠 지음 ; 전옥례 옮김
  • 출판사운디네
  • 출판년도2004년
  • ISBN8990633087
  • 가격38000원

상세정보

나의 예술은 아틀리에가 아니라 삶에서 나온다 

1867년 7월 8일에 프로이센의 쾨닉스베르크에서 태어난 콜비츠는 자유주의 전통의 중산층 집안에서 자라났다. 외할아버지는 진보적인 목사였고, 아버지는 법관 대신에 미장이가 된 독특한 이력의 사회주의자였다. 이처럼 도덕적,종교적,정신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가풍은 그녀의 가치관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콜비츠는 1881년(14세)부터 미술 수업을 받기 시작했으며 베를린 여자예술학교 등에서 유화를 공부했다. 그런 그녀가 그래픽 아티스트가 되기로 결심한 까닭은 소묘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으며, 복제가 가능한 판화는 널리 공유될 수 있다는 주장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1891년(24세)에 의료보험조합의 의사인 칼 콜비츠와 결혼했으며, 무료로 가난한 노동자들을 진료하는 남편을 도우면서 판화 작업에 몰두한다. 가난과 질병, 실직과 매춘이라는 참혹한 현실을 목도하게 된 후 자신의 작품이 환기구이자 통로,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의무감을 가지게 된다. 1893년부터 <직조공 봉기> 작업에 몰두했는데, 이 연작은 대베를린예술전에 출품되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면서 금메달 수여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을 ‘쓰레기 같은 예술’이라 혹평한 황제 빌헬름 2세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사회적 이슈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게 된 그녀는 이후 모교인 베를린 여자예술학교에서의 강의, 유명한 주간지 <짐플리치시무스>의 삽화를 비롯한 수많은 소묘?판화 작업, 빌라 로마나 상을 수여하는 등 명실상부한 전성기를 맞이한다. 1908년에 완성한 <농민전쟁> 연작은 짐승처럼 혹사당하는 농민, 능욕당한 여성, 농민들의 봉기, 학살과 체포로 끝을 맺지만 그들의 당당하고 억센 눈빛에서 강렬한 희망을 느끼게 한다. 


씨앗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던 그녀에게 충격적인 비보가 날아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4년 10월, 둘째 아들 페터가 18세의 나이로 전사한 것이다. 아들의 죽음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으며, 반전 포스터와 기념비를 제작하는 등 전쟁의 광기와 참혹함을 알리는 대열에 적극 동참하게 된다. 1919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프로이센 예술아카데미의 회원이자 교수로 임명되었다. 
1933년 나치의 히틀러가 집권한 후, 예술아카데미 탈퇴를 강요받았으며 작품은 철거되고 개인 전시회는 금지되었다. 경제적인 곤궁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과의 소통 통로마저 차단된 것이다. 대신 나치는 그녀의 작품을 ‘퇴폐미술전’에 전시하여 비웃음과 조롱거리로 삼는다. 이후 가택 수색, 게슈타포의 신문, 강제수용소로 이송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외로운 말년을 보낸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에 남편이 사망하고, 1942년 손자 페터가 러시아에서 전사한다. 노환과 비탄 속에서도 진보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담고 있는, 마지막 석판화 <씨앗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를 완성한다. 다음해에 폭격으로 집이 파괴되면서 상당수의 작품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1945년 4월 22일에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로부터 8일 후 히틀러는 자살하고, 7일 후 나치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예민하고 음울했던 한 여인의 내밀한 기록 

자애롭고 강인한 어머니로서의 콜비츠. 기실 이는 그녀의 수많은 페르소나 중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여느 예술가처럼 그녀도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으며, 천성적으로 예민하고 우울한 기질이 강했다. 갓난아기 남동생의 죽음이 그리스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놀이를 한 자신 때문이라는 정신적 압박에 사로잡혔으며 성인이 될 때까지 밤에 대한 공포, 사물이 작아지는 악몽들, 공기가 없는 상태에 있거나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막연한 느낌에 시달렸다. 
초기에 노동자와 하층민들을 즐겨 그린 것도 ‘쩨쩨한’ 시민계급과 달리 그들이 아름답기 때문이며,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었다.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어머니를 돌보면서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 노환으로 맑은 정신을 잃어가는 어머니에게 안쓰러움과 강렬한 사랑을 느끼다가도 어머니 때문에 작업을 할 수가 없다고 한탄하는 어쩔 수 없는 예술가였던 것이다. 또한 명성과 존경을 얻은 뒤에도 창작 능력에 대한 끝없는 회의와 의심, 도덕적 용기가 결여되어 있다는 자책에 빠진다. 예술에 대한 강박적인 열망과 집착,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가 이내 휴전 상태로 젖어드는 극심한 감정의 기복은 그녀 역시 창작의 고통과 열등감 때문에 평생을 자살하기 직전의 절망 속에 살아가는 예술가였음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나약하고 불안정한,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이 여인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과 동일시하는 예민한 감수성과 인류애를 가지고 있었다. 체념과 절망이 내면을 잠식해 들어가는 순간에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우리 안의 도덕성, 인류애에 절박하게 호소하는 작품을 만들고자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녀의 일기는 고투를 벌이는 한 인간의 연약한 모습과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려는 투지에서 아름다움과 힘을 느끼게 한다. 

“스케치하면서 아이들이 느꼈을 두려움 때문에 나도 울었다. 그때 내가 지고 있는 짐을 진심으로 느꼈다. 그들을 대변해 주는 사람이 되는 게 내 임무다, 나는 거기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건 끝나지 않을 일이다. 이제는 태산 같은 사람들의 고통을 입 밖에 내어야 한다. 그게 내가 맡은 임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해내는 건 정말 쉽지 않다. 흔히들 일을 하면서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이 포스터를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빈에서는 날마다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간다면, 과연 일이 내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전쟁에 관한 그림을 그릴 때, 전쟁이 계속해서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데도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단연코.” -본문 중에서 



몸으로 근심하고, 몸으로 우는 어머니 

‘조국이 나를 필요로 해요!’라며 아들은 전쟁에 자원 입대를 했고 콜비츠는 아들의 간곡한 청을 만류하지 못했다. 그리고 두 달 뒤 아들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아들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애국’과 ‘이념’이라는 ‘끔찍한 사기’에 속아 꽃다운 목숨을 잃었다. 그녀는 뒤늦게 속았다는 한탄으로 가슴을 쥐어뜯는다. 아들을 설득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 심장이 부서지는 것 같은 그리움, 아들의 부재를 상기시키는 환영이 시시때때로 찾아든다. 그러나 그녀는 비탄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었다.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은 그렇다면 속은 게 아닐까? 전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청춘이 가진 희생하려는 마음을 이용한 게 아닌가? 책임을 지는 자들은 어디 있는가? 과연 그런 사람이 있기나 한가? 모두 속은 사람뿐이지 않은가? 그 모든 게 대중의 망상에 지나지 않은 건가? 언제, 어떻게 해야 이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본문 중에서 

망상에 사로잡힌 대중들을 일깨우는 것, 희생당한 젊은 청춘들을 기념하는 것, 그리고 더 이상 무의미한 희생이 늘어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씨앗을 끝까지 발아시킬 임무’가 있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책무였다. 
이렇듯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그녀의 의도를 프로파간다라고 섣불리 단정지을 수 없는 이유는 ‘세계 미술사상 처음으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로서 전쟁화를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절망으로 힘없이 내려간 손, 음식을 갈망하는 아이들의 두 손과 눈빛 등 몸짓 하나하나에서 분노, 슬픔, 절망, 굶주림을 강렬하게 표현해냈다. 그것은 끔찍한 세태 고발, 시각적 충격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세상에 퍼져 있는 증오에 증오로 화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은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동참하게 하며, 아무리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은 잃지 않았다. 
콜비츠가 살았던 시대처럼 여전히 세계 전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전쟁, 기아, 폭력, 증오로 가득한 세상에서 예술 혹은 문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술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 라는 낡은 그러나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아직도 그녀의 작품은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서 부끄러움을 끌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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